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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Mar 06. 2024

마침내, 사랑해 볼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헤어질 결심> 서래의 집 풍경

※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를 것 같지만 산과 바다는 의외로 균질한 교집합을 가진다. 초록과 파랑으로 표현되지만 파란 산과 초록 바다가 있고, 산 위의 구름을 그린 그림과 바다의 파도를 그린 그림은 무척 비슷하다. 그리고 산과 바다에는 모두 흙이 있다. 산은 흙을 쌓아 올린 탑이고, 바다는 흙 위로 흐르는 물 같다. 산과 바다는 아주 많이 다르고, 무척 많이 닮은 남녀의 사랑의 방향 혹은 방식과 닮았다.  


사랑이라는 상황

산 정상에서 추락한 남자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얼핏 웃음을 보이는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용의자로 의심한다. 서래를 관찰하는 해준의 잠복수사는 점점 호기심 가득한 훔쳐보기로 변하고, 서래에 대한 의심보다 더 커진 관심은 형사로서의 중심을 흔든다. 

살인사건이라는 커다란 이야기에 비해 <헤어질 결심>은 사실 서래가 진짜 살인자인지 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흐트러짐 없는 바를 정(正)자 같은 형사 박해일과 비밀이 많은 여인 탕웨이는 사건이 아닌 서로의 감정으로 얽힌다. 형사로서는 의심하지만, 남자로서는 지키고 싶은 해준의 마음처럼 관객들도 자꾸 서래의 의심스러운 과거와 상관없이 현재, 그녀의 사랑이 진짜이길 바라게 된다. 

<헤어질 결심>은 굳이 메모를 하면서 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인공적인 미장센을 회화처럼 나열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현란한 수사도 복잡한 이미지도 많이 내려놓고 특유의 잔혹함까지도 덜어내어 눈을 질끈 감을 필요 없이 오롯이 인물과 인물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기류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여전히 주인공들을 산과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의 풍광 속에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게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는 시점은 공간이 아닌 상황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오가는 많은 공간들 속에 두 사람이 마침내 사랑할 결심을 하게 되는 상황을 촘촘하게 새긴다.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공간의 변화만큼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높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가 달라지는 변화 과정이 다채롭다.

 

바다 속으로 자라는 산

한국어로 소통할 수 없는 여성과의 농도 짙은 소통을 설득하기 위해 서래라는 주인공은 <헤어질 결심>이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개연성 그 자체다. 서래의 진심은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슬쩍 보일 듯 말 듯 애를 태운다. 그렇게 직접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탕웨이는 표정과 호흡, 미간과 입술의 작은 변화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설득한다. 

과거와 상관없이 이제는, 비로소, 마침내 사랑을 해 보리라 결심한 두 남녀를 통해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끝내는 의미로서의 헤어짐이 아니라 사랑에 영원을 더하기 위한 독한 헤어짐의 방식을 보여준다. 불필요한 의미를 숨겨두지 않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다 보여준다. 

그래서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바람을 가질수록 헛헛해질 수 있다. 불균질한 요소들이 툭 삐져나와 충돌과 파괴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이전 작품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무척 친절하다. 그래서 불친절한 서사의 결핍으로 상상의 여백을 만들고, 이미지의 과잉으로 관객을 매혹시킨 박찬욱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슴슴한 맛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지막, 서래는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침잠한다. 뒤늦게 나타난 해준은 바닷가를 뒤지다 결국 서래가 가라앉은 모래를 딛고 서지만, 그녀를 알아채지 못한다. 가라앉아버린 여자와 그 위를 딛고 선 남자는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도저히 만날 도리가 없다. 어쩌면 모래는 바다 속으로 자라는 거대한 산인지 모른다. 함께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곳으로 자라나는 남녀의 사랑처럼 말이다


명대사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헤어질 결심>(2022)

감독 : 박찬욱

출연 : 박해일 (해준), 탕웨이 (서래), 이정현 (정안), 박용우(호신), 고경표(수완)

개봉일 : 2022.06.29.

관람객수 : 190만명

볼 수 있는 곳 : 티빙, 넷플릭스, 왓챠, U+모바일tv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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