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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Jul 29. 2024

눈을 뜬 인형, 세상으로 나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프리실라' 리뷰

'프리실라' 스틸 컷

아주 어린 시절엔 내 눈으로는 무언가를 맑고 온전하게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거나,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누군가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편이 쉬웠다. 그렇게 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 속 나는 훨씬 앞서 있고, 훨씬 빨리 성장한 것 같다고 믿었다. 하지만 타인의 관점이나 도움 없이 온전히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순간, 내가 알던 세상은 이전과 너무 다르다. 나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봐야, 비로소 내가 딛어야 할 땅도, 길도 보인다. 


인형인형의 집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이사 온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는 미군 기지의 파티에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난다. 엘비스와 프리실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첫 눈에 반해 서로에게 빠져든다. 평범한 소녀였던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저택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되고,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세계적인 슈퍼스타와의 삶은 생각만큼 빛나지 않는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프리실라’는 세계적인 슈퍼스타 엘비스와 1959년 첫 만남부터, 1967년 결혼생활, 그리고 1973년 이혼까지의 삶을 프리실라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는 영화다. 프리실라라는 이름 대신 엘비스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프리실라가 자신의 삶에 눈을 뜨고 결국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인형처럼 살아온 여인의 자각이라는 점에서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속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프리실라’는 엘비스라는 빛의 뒤, 길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 살았던 프리실라의 관점에서 엘비스와의 관계를 바라본다. 14살부터 20대 후반까지 수줍던 소녀에서 세상을 깨치는 여성으로 거듭난 프리실라를 연기한 케일리 스패니는 이해가 안 되는 두 사람의 묘한 관계의 빈틈을 케일리 스패니는 눈빛과 표정으로 채운다. 이 영화로 2023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통해 보면 프리실라의 부모는 그녀를 통제하거나 보호하지 않는다. 프리실라는 엘비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아주 어린 소녀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엘비스의 통제 아래 있는데, 그런 수동적인 삶이 문제라고 생각해볼 여유도 없다. 엘비스의 사랑을 갈구하고, 낮 시간에는 고등학교를 다녀야 한다. 프리실라는 엘비스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엘비스가 골라주는 옷을 입고 그가 원하는 색으로 염색하며 엘비스의 인형처럼 살아간다. 


그 여자관점에 눈뜨다

영화는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1985년에 쓴 회고록 『엘비스와 나』를 원작으로 한다. 회고록의 제목은 여전히 엘비스를 앞에 두지만,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는 프리실라 프레슬리를 이야기의 맨 앞에 둔다. 그래서 엘비스와 프리실라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세기의 스타와 결혼한 여자, 프리실라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엘비스라는 별에 눈이 멀어 자신을 놓쳤던 한 여인이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보겠다고 눈을 뜨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1959년, 엘비스가 독일에서 프리실라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14살이었다. 엘비스의 초대로 프리실라가 엘비스의 집에서 살게 된 건 그녀가 고등학생 때였다. 미성년자인 프리실라를 엘비스에게 보낸 그녀의 부모도, 그 오랜 시간 동거하면서 결혼이 늦었던 이유도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코폴라 감독은 실제로 프리실라를 만나서 궁금한 이야기를 물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 뚜렷한 설명은 없지만, 누군가의 삶은 그렇게 우연히 결정되어 운명처럼 방점을 찍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득한다. 


실제로 엘비스를 만난 이후, 프리실라의 삶은 완전히 사라진다. 평범한 시골 마을의 소녀였던 그녀가 전 세계 여성들이 선망하는 엘비스의 여자가 된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다. 모든 삶이 엘비스의 스케줄을 따른다. 엘비스를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 혼자만의 삶에 불쑥 끼어드는 것은 다른 여성들과 엘비스의 스캔들 기사다. 


실제로 프리실라 역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캣 아이 메이크업과 마사 심슨을 떠올리는 한껏 부풀린 부팡 헤어스타일을 따라했다. 가장 화려한 곳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 프리실라는 아름다운 성에 갇힌 인형처럼 보인다. 바비의 집처럼 화려한 색감의 집이 시간이 지날수록 일종의 박물관처럼 편안하지 않은 색감으로 변하면서 프리실라의 마음을 대변한다. 


관점에 따라 엘비스 프레슬리는 아주 나쁜 남자처럼 보이지만, 프리실라에게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미워해서 헤어진 것은 아닌, 그런 관계라 여전히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다. 코폴라 감독은 그 어떤 상황도 이야기의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과장하지 않고 프리실라와 엘비스라는 사람과 그 관계를 요동치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부분 한 사람의 자각이 가장 추락한 시간 속에서 시작되는 것과 달리 프리실라는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자신을 찾는다. 프리실라가 엘비스를 떠난 시절에 그와 그녀의 삶은 여전히 정상에 있었다. 엘비스가 원하던 인형이었던 그녀가 본인의 머리색을 다시 찾고 차분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으로 변한다. 엘비스를 기다리는 일 이외에 그녀는 자신을 위한 일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도 배운다.  


흔히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몰랐던 여자의 얼굴이 영화 속에 있다. ‘프리실라’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살아왔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야기 속에서 늘 부록처럼 그려지던 프리실라를 한 사람의 여자로 불러내, 소중하게 바라본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한 여인의 다음 이야기를 응원하는 이야기에는 여전히 한 사람으로 우뚝 서서 자신의 길을 찾아 발을 딛어야 하는 우리를 위한 응원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영화음악 정보 

ABKCO / 음악감독 토마스 마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남편이자 그룹 피닉스의 보컬인 토마스 마스는 감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영화와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아쉽게도 엘비스의 공연 장면은 뒷모습으로 담는 것으로 끝난다. 대신 1960년대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팝을 가득 넣어 복고적 정서를 담아낸다. 엘비스를 떠나는 프리실라의 마음을 담은 엔딩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돌리 파튼의 ‘I will always love you’인데, 정식 OST에는 담겨있지 않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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