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최재훈 Jun 28. 2024

찬란하게 살아간 인생이라는 축제, 10년

후지이 미치히토의 ‘남은 인생 10년’ 리뷰

'남은 인생 10년' 스틸 컷
벚꽃 축제를 가본 적이 있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을 걸으며 사람들은 모두 카메라를 꺼내들고 환하게 웃으며 밝게 빛나는 자신의 현재를 기록한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찬란한 꽃잎들은 사실 벚꽃이 소멸되는 것이다. 벚꽃이 더 많이 소멸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즐거워하며 삶을 즐긴다. 이 찬란한 삶과 죽음의 묘한 역설에 우리는 굳이 ‘축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벚꽃도 축제도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순간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 끝은 소멸이라는 점이 닮아서일까? 


그 남자, 20년의 죽음

스무 살이 되던 해, 수만 명 중 1명이 걸린다는 난치병에 걸려 최대 10년의 삶을 선고받은 마츠리(고마츠 나나)는 삶의 의지를 잃은 카즈토(시카구치 켄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처음 만나 벚꽃과 함께 사랑을 느끼던 봄, 첫사랑의 설렘으로 뜨거웠던 여름, 쓸쓸하지만 깊은 가을, 눈부시게 빛나는 겨울을 거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지지만 언제 죽음으로 끝날지 모를 아슬아슬한 사랑 앞에서 마츠리는 이별을 선택한 후 삶을 정리하며 소설을 쓴다.


사랑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끝나는 날이 정해진 사랑을 선뜻 시작할 수 있을까?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영화 ‘남은 인생 10년’의 주인공은 시한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소멸을 전제로 시작되는 청춘의 짧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추억이 쌓여가는 동안 살아갈 날은 줄어드는 역설이 반짝이는 청춘의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화는 2007년 실제 불치병에 걸린 코사카 루카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출간되었는데, 2017년 수정한 문고판을 출간한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원작이 죽음을 묵도하는 기록이었다면 미치히토 감독은 ‘죽음’이 아니라 주인공 마츠리의 ‘삶’을 그리고 싶어서 코사카 루카의 가족들에게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벌어졌던 다양한 삶의 에피소드를 수집해 영화에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죽음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다.  


우리의 삶 속에서 청춘은 항상 빛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미치히토 감독은 마냥 살아있는 게 벅차지 않은 카즈토에게도 아침의 볕과 사람의 관심을 준다. 죽어보려는 결심을 했던 것처럼 그의 인생 20년은 죽어 있었다. 마음의 시간이, 세상을 향한 관심이 낙엽처럼 바삭 말라있다.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그에게 비로소 살아갈 이유를 준 것은 삶을 잃어가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는 벚꽃 같은 여자 마츠리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가장 아름답게 사라지는 봄의 벚꽃은 마츠리를 상징한다. 아주 짧게, 가장 아름답게 살다가 사라지는 운명을 타고났다. 건강하지만 마음의 병으로 자살하고 싶어 하는 카즈토는 가을을 닮았다. 살고 싶은 여자는 살지 못하고, 죽고 싶은 남자는 죽지 못하는 묘한 운명 앞에서 두 사람을 서로를 살게 하는 이유가 된다. 봄을 닮은 여자와 가을을 닮은 남자는 함께 하면서 따뜻하고, 덥고, 시원하다가 추워지는 온전한 사계절이 된다. 


그 여자, 10년의 삶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한 여성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삶의 유한함과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미 원작소설을 집필하고 세상을 떠난 원작자가 있기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여성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조금 더 신중하게 펼친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측은한 마음이나 동정심 대신 소멸이 아닌, 삶이라는 생생한 순간을 벅차게 채워 보여준다. 


‘남은 인생 10년’은 2022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2023년에 개봉했지만 2024년 봄, 벚꽃이 흐드러진 시기에 재개봉했고 첫 개봉 때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재개봉 시점에 DK, 휘인, 폴킴, 적재, 10cm, 헤이즈, 조이, 안세하 등 한국가수들이 영화의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가요로 콜라보레이션 음원을 발매한 것도 화제성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해외 영화의 영상과 국내 음원의 조화로운 마케팅으로 기록될 만하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사랑과 소멸을 그리는 이야기 속에서 계절은 그들의 시간의 기록이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특히 두 사람의 첫 시작으로 기억되는 벚꽃 장면은 영화의 가장 소중하게 보여야 하는 장면이다. 10년이라는 시간 속 매 계절에 담기는 애틋함을 기록하기 위해 후지이 감독은 촬영기간을 1년 이상 가졌다고 하는데 그 정성이 아름답게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아름다운 벚꽃 만개를 보여주기 위해 최근에는 CG를 많이 쓰지만 감독은 가장 자연스러운 벚꽃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벚꽃이 만개할 시점에 맞춰 촬영일정도 조정했다고 한다. 계절을 상징하는 어떤 시점들이 두 사람의 그만큼 일본의 계절과 두 사람의 관계가 잘 표현되었다. 겨울이면 생각이 나는 ‘러브레터’처럼 매해 봄이면 이 안타까운 청춘들의 삶이 떠오를 것 같은 영화가 되었다. 


다시 축제를 생각해 본다. 모두가 즐거운 순간, 문득 혼자 있는 것 같고, 우울했던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 일어나는 소동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방금까지 한산하던 곳이 꽉 채워지고, 북적대던 공간이 싹 비워지는 순간은 마법 같다. 이 즐거움이 끝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것이 안도가 되기도 하는 축제는 우리의 인생을 닮았다. 


제목과 달리 영화는 남은 인생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살아가는 10년의 소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라지는 청춘을 바라보는 무거움 보다 소중한 삶의 순간을 더 예쁘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떠나보내 지키고 싶은 마음도, 혼자 남을 걸 알지만 기어이 잡고 싶은 마음도 모두 다 예쁘다. 그러니 이 삶은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죽음의 직전까지 또 살아가고 살아내야 하는 온전한 삶이라는 것. 그래서 기어이 살아가는 시간의 아름다움이 반짝거린다. 


[영화음악 정보음악 래드윔프스 Radwimps

영화의 엔딩곡으로 나오는 래드윔프스의 노래 Ms.Phenomenal은 아름다웠던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추억하게 만드는 곡이다. 영화관에서건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감상하길 바란다. 뮤직 비디오는 남겨진 카즈토의 마음과 그 찬란한 사랑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쓸쓸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생각날 때 꺼내 보아도 좋은 앨범 같다. OST에는 래드윔프스가 직접 작곡한 총30곡이 담겨있는데, 인물들의 정서와 관객이 느껴야 하는 감흥을 방해하지 않는 아주 잘 정돈된 이라 영화와 상관없이 따로 들어도 좋은 곡들이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이전 15화 끝끝내, 기어이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