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차이콥스키의 아내' 리뷰
나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 연인으로서의 나, 학교에서의 나, 사회생활 속 나, 누군가의 누구로서의 나는 계속 가면을 바꿔가며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며 계속 다른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것이 많을수록, 내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의 연기는 좀 더 다채로워진다.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사회적 맥락에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진짜 나는 그 속에 없는 것 같다.
깨진 사랑도 사랑이라고
19세기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가문 출신의 안토니나(일리오나 미하일로바)는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를 처음 본 날부터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에 대한 소문도 많았지만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차이콥스키의 무관심에도 그녀는 그를 포기하지 않고, 점점 사랑에 집착하며 광기에 사로잡힌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차이콥스키에 대해 떠도는 소문과 그에 대한 전기 중에서 가장 소란스러웠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의 결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나가 각각 37세와 28세의 나이에 만나 결혼한 1877년부터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1893년까지의 두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결혼한 이후 차이콥스키의 신경 쇠약과 우울증은 깊어졌고, 안토니나는 결혼 이후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혀 무너진다.
차이콥스키에 관한 저서와 문서, 일기, 서신을 바탕으로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나의 진짜 삶을 복원해낸다. 실제로 극중 안토니나의 대사는 안토니나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가장 사실에 가깝게 가공했다고 한다. 특히 차이콥스키를 사랑하는 아내라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연기하는 안토니나를 통해 순수한 사랑과 지독한 집착에 사로잡힌 마음이 종이의 양면처럼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한 것에 비해 차이콥스키라는 사람에 소문을 은유로 묻어두기 때문에 관점이 불투명해보일 때가 있는데, 안토니나의 시선에서 그녀가 직접 보고 들은 정보만 전달하며 관객들 역시도 차이콥스키를 추측하라고 하는 것 같다. 사실 차이콥스키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한 것은 러시아의 정치적인 태도도 큰 몫을 한다. 당시 저급하다고 불리던 모든 것들을 필터링해서 차이콥스키를 고귀한 음악인으로 포장하면서 정작 진짜 차이콥스키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지운 것이다.
물론 당연히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감상하고 좋아하기 위해 그의 사생활을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의 정서를 조금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그의 창작에 영향을 미친 개인의 삶까지 함께 더듬어 함께 느껴보는 정성을 가져 봐도 좋다. 그렇다고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그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돕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시대의 통제 속에서 인간의 본심과 진심마저도, 진짜 사랑과 연애를 하는 몸과 마음까지도 통제받던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들여다본다.
시대라는 연극, 사랑이라는 연기
러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19세기의 러시아는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되던 시절이었다. 소수의 사랑은 금기였고, 여성이 이혼을 하기 위해서 국가의 공식적인 허가와 법원의 명령이 있어야 하던 시절이다. 감독은 19세기 러시아 자체는 연극무대이고,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연극배우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시절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상을 입어야 했고,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을 연기해야 했던 것 같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려 했던 한 여인과 사랑을 통제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거짓 삶을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둔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려 했던 한 여성의 파국을 통해 시절을 돌아보고, 강압적인 사회 속에서는 온전히 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부리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비참한 마음으로 공감한다.
감독은 무대의 요소를 시각적으로 배열하고 조직하는 연출로서의 미장센(mise-en-scene)을 화면에 담기는 모든 조형적 요소를 직조하는 영상의 미장센으로 만들어낸다. 배우들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그사이의 쉼표까지 영화 속 연기는 무대의 연기를 닮았다. 때론 연극처럼, 때론 뮤지컬처럼, 또 무용극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공연을 보는 것 같다. 특히 안토니나가 미쳐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엔딩의 무용 씬은 그 자체로 부끄러움과 고통, 광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적 문법으로 보자면 키릴 감독의 연출은 낯설어서 매력적이다. 무대와 영화, 장르의 차이를 굳이 경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밀어붙여 설득하려는 뚝심을 부리고 기어이 지독한 집착이라는 마음을 극의 언어를 이용해 영상으로 표현해낸다. 게다가 사랑과 욕망, 비밀과 파국 등 통속극을 상상하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도 시대에 대한 통찰과 그 시대 속 살아있는 한 여성의 숨결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차이콥스키에 대한 많은 소문과 의혹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오직 안토니아가 알고 있는 정도만 관객들에게 공유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관점을 확대하기 보다는 사회라는 시스템에 의한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이를 통해 억압된 사회의 분위기, 시선이라는 고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펼쳐보지 못했던 한 여성의 삶을 함께 살아낸다.
안토니나라는 인물은 달아나는 법을 모른다. 차이콥스키라는 작곡가의 뜨거움에 화상을 입고, 차이콥스키라는 남편의 차가움에 동상을 입으면서도 계속 그의 곁에서 살아간다. 집착하는 여성의 광기어린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 차이콥스키라는 사람의 들러리 혹은 그림자처럼 박제되어 있던 한 여성의 삶을 현재로 불러와 다시 살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남은 한 줄의 기록이겠지만, 그 시절 속 안토니나는 살아있는, 젊고, 아름답고, 생생하고, 사랑이 넘치는 한 사람이었다. 재능이 있었지만 음악인이 될 수 없었고, 여자라서 제 목소리로 살아갈 수 없는 시절 속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던 그 소망을 짓밟힌 채 사라진 한 여인의 삶이 생명을 얻었다. 이렇게라도,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인정해 준다면 무덤 속에서라도 긴 한숨 쉴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음악 정보] 음악 Danill Orlov / Online release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다닐 오를로프가 음악에 참여했다. 차이콥스키의 연주곡은 들을 수 없지만,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잇는 다닐 오를로프의 음악은 영화의 미장센과 어우러지면서 영상 속에 녹아들기도 하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는 폭발하는 에너지로 영상의 미장센에 극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