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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May 13. 2024

존엄이라는 볕의 곁에서

근로자의 날 기념 칼럼_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 컷
각자의 기억은 찢어진 천 조각 같다. 이야기 그 자체 보다 그 시절의 정서가 기승전결 없이 순간의 감각과 정서로 남아있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기억은 억울하고 분했던 그 시간을 끈질기게 붙잡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둔다. 그런 기억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펼쳐, 그 순서대로 한 땀 한 땀 소중하게 이어야 한다.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기워낸 커다란 이야기를 활짝 펼치면 그제야 비로소 그 시절이 보인다. 

 

19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에는 집안이 가난해서,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 대신 미싱을 타야했던 소녀들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은 건조하고 거친 그녀들의 삶이지만 저마다 가슴에 품은 꿈 하나는 버릴 수 없어서, 삶을 배울 수 있는 노동교실이 삶의 희망이었던 그 시절의 증언을 담는다. 노동교실에서 소녀들은 시다라는 직업으로 불리지 않고 서로의 진짜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아낀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교실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는다. 


역사는 사건을 기록하지만, 예술은 그 시간 속,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혁래, 김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은 1970년대 청춘의 한 시절, 각자의 이유로 청춘을 저당 잡혔지만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로 한 여성들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온다. 1977년 9월 9일. 역사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던 시간과 그 속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숨결과 그 여리고 아팠던 기억을 소중하고 신중하게 더듬는다. 그리고 그들의 값진 삶을 기억하고 작지만 소중한 마음들을 위로한다.


다큐멘터리는 『청계피복노동조합 투쟁사』의 마지막 한 줄로 기록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9·9 투쟁. 이소선 석방과 노동교실 반환을 요구하며 결사투쟁. 민종덕 투신, 신승철, 박해창 할복 기도, 전순옥, 임미경 투신 기도.’ 이 한 줄에 담긴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기억과 그 삶의 조각들을 부려놓고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하듯 기워낸다. 극악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비판이나 객관적 지표 속에서 희생된 여성이라는 표식 대신, 배움이라는 꿈과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뜨겁게 살았던 여성들의 표정과 생생한 목소리를 포착해 낸다. 


그들이 직접 작성한 일기, 편지, 그리고 그 시절의 사진 위로 생생한 증언들을 입혀, 가장 뜨겁고 가장 아팠던 여성 노동자의 시간을 화면 위에 수놓는다. 무척 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혁래, 김정영 감독은 감정을 과잉을 최대한 자제한다. 눈물을 쏙 빼놓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과한 감수성을 털어내고 오직 그 시간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일에 집중한다. 그래서 <미싱타는 여자들>은 선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공감을 주는 이야기가 된다. 


아픈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깊이 박혀 있는 것 같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처지를 보듬어 주는 조금 더 따뜻한 연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위로 그들이 부당함에 맞서지 않았다면 변화된 우리의 내일도 없었을 거라는 후배들의 존경과 존중의 시선을 꾹꾹 눌러 담는다. 노동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모독의 시간을 견뎌온 이야기를 함께 나누자 한다. 그리고 노동의 효율 보다 인간이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게 만든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시간과 몸을 희생한 이야기는 보는 이들에게 멍 같은 죄의식을 남긴다.


다큐멘터리 속, 그 시절을 살아낸 여성들은 그 시절에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이 주저앉힌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고, 시절이 부정했던 나를 긍정하려는 힘, 그 가치에 대해서 묵묵하게 이야기 한다. 4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재회한 젊은 시절의 그녀와 만난 오늘의 당신들은 그래도 참 잘 살았다며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 빛이 되는 그 벅찬 순간은 우리에게도 볕처럼 따뜻한 위안을 준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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