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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Apr 29. 2024

사람과 자연의 경계, 재난 이후의 질문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 컷

질문은 있지만 답은 없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풀어보려고 했던 신의 영역, 인간이 도달하려고 했던 우주의 영역, 인간이 극복해 보려고 했던 자연의 영역은 인간에게 답이 없는 질문이다. 모든 것을 아는 척, 자연 위에 군림해 온 인간들은 뭐든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이 무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 그래서 개념을 꺼내고 분석하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기어이 해석을 내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재난이후의 재난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와 하나(니시카와 료) 부녀는 도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어느 산골 마을에 살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시점, 마을에 글램핑 야영장을 만들겠다는 주민 설명회가 열리고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하지만, 주민들은 반대한다. 타쿠미를 이용해 주민을 설득하려는 묘책을 가지고 외지인이 다시 찾아 온 날, 하나가 사라진다.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후 ‘드라이브 마이카’로 칸영화제 극본상,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아 세계 4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40대에 벌써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영화는 그의 작품 중에 비교적 짧고 줄거리도 꽤 단순한 편이지만 어리둥절한 결말 때문에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는 작품이다. 해석이 분분한 결말 때문에 실제 관객들의 평도 많이 갈린다. 하지만 묘하게도 처음 당혹스러움은 집에 가서는 궁금증으로, 며칠이 지나 다시 생각하면 감탄으로 변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최근에 겪은 가장 기묘한 사건은 코로나 19라는 팬데믹이다. 아주 요란스럽게 시작했던 것과 달리 누구도 이 팬데믹이 제대로 끝난 건지, 이제는 괜찮은지, 앞으로는 괜찮을 건지 말해주지 않는다. 팬데믹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인류에 대한 경고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다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팬데믹은 요란했지만 아직 그것을 품어낸 예술작품이 아직 드러나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팬데믹 이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처럼 보인다. 영화 속 글램핑장의 오수방류는 일본의 오염수 방류와 묘하게 겹치면서 재난 이후, 사람들에 의해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재난을 보여준다.


글램핑장 건설을 위한 설명회 장면은 꽤 아이러니하다. 도쿄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척이나 선진적인 계획을 세운 것처럼 굴지만 산골 사람들에게 그들의 계획은 엉성해서 계속 공격받는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하는 산골 마을 사람들의 역설은 글램핑이라는 변종을 만들어낸 도시인들의 미개함을 꾸짖는 것처럼 보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의 제목은 호텔처럼 편하게 캠핑을 즐기자는 ‘글램핑’이라는 합성어처럼 기묘하게 거슬리는데 이러한 이물감이 영화의 메시지와 꽤 맞아떨어진다. 전쟁을 통한 침략과 약탈, 오염수 방류까지 그간 역사적으로 많은 잘못을 저지른 일본은 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려는 노력보다 감상에 빠지는 방식으로 반성을 피해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 여전히 자행되는 자연파괴에 대한 화두를 꺼내면서 그런 일본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그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방식을 꺼리지 않는다. 일본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재난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자연과 사람경계선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종종 낯선 카메라의 시점을 보여주면서 영화 속 인물들의 시점 속으로 관객을 급히 불러들인다. 예를 들어 하나를 놓치고 따라가는 타쿠미의 차를 찍을 때는 언제나 도로의 뒤편을 블랙박스처럼 담아 마치 타쿠미의 차량을 따르는 것처럼 만든다. 도시에서 산골로 들어서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뒤통수를 카메라에 담아 관객들이 그들과 동승하고 있는 것처럼 만든다. 


가장 흥미로운 시점은 숲과 사람을 잇는 카메라의 시점이다. 류스케 감독은 흔히 피사체를 관객의 시점에 맞추기 보다는 사건의 시점에 맞춰 이야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한다. 영화의 시작에 사람이 숲을 올려다보며 걷는 것 같은 롱테이크는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면 숲이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이었을 수도 있겠다, 자각하게 한다.


타쿠미가 줄곧 모든 사람들에게 반말을 한다는 사실과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는 심부름꾼처럼 설정이 된 것, 하나는 아기 사슴처럼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난다는 점, 그러니 어쩌면 타쿠미와 하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계를 이어주는 일종의 전령 같은 것이 아닐까, 혼자 부려본 해석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논쟁적인 결말 때문에 아주 다양한 해설이 쏟아지겠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 명제처럼 자연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자연은 종종 인간의 공격에 맞서 인간을 공격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연의 불가해한 공격, 그 경계선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결국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쿠미의 행동도 인간이 자연의 선택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로 바라볼 수 있다. 


이미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은 불가해한 자연의 영역처럼 인간계를 살짝 뛰어넘은 것처럼 보인다. 악의 존재 유무를 이야기할 것 같은 단정적인 제목과 달리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단정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마치 재난과 그 후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바튼 결말의 끝에 관객과 영화의 시간은 뚝 끊기고, 장면과 장면 사이를 복기하는 사이, 영화는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기어이 이것이다, 해석을 내어놓는 대신 류스케 감독의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개념이 아니라 감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고 보면 정작 류스케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정작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린 문 틈 사이로 길고 긴 꼬리가 남아있기 때문에 누구도 문을 닫을 수가 없다. 


[영화음악 정보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으로 기획되었다가 극영화로 발전한 작품이다. 그만큼 음악과 영상은 각자의 역할을 한다기 보다 처음부터 한 쌍처럼 보인다. 음악은 황량한 숲의 풍경과 계속해서 시점이 바뀌는 카메라, 미스터리한 감정을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그 정서를 그대로 따른다. 아직 정식 OST는 발매되지 않았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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