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실패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정말 후회 없이 보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조금 방황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는 최선을 다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모의고사 성적도 괜찮게 나왔기에, 나는 의대에 진학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수능에서는 평소보다도 훨씬 성적이 떨어졌고, 나는 중학교 졸업식 때를 이어 내 인생 두 번째의 좌절을 경험했다. 그렇지만, 좌절을 느끼고 있기에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 해, 12월에 곧바로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최고의 강사진과 함께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또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도 궁금했다. 고3 시절에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수능을 거치며 나에게 부족한 점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에는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나는 새해를 학원에서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 공부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재수를 시작한 학원은 공부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눈부시게 발전할 나를 상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하니, 성적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이 되니, 내 성적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6월 평가원 모의고사를 치고 난 뒤에 지방의대 정도는 넉넉하게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히 이때가 내가 조금 풀렸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날씨도 따뜻해지고, 내 성적도 추웠던 겨울과 달리 점수가 아주 잘 나와서 그런지, 이젠 공부 외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효율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친구들과 어울렸고, 주위의 여학생에게도 눈이 돌아갔다.
물론,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으니, 평소의 공부량을 채우긴 하였지만, 성적을 유지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 일정 수준 이상의 공부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는 시간에 스트레스를 풀면 공부가 더 잘 된다’라는 친구의 말에 마음이 동요되며 공부에 대해 간절함이 사라졌다.
그 당시의 나는 오랜 시간의 수험생활과 타향살이에 지쳐 있었다.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주위의 친구들과 안면을 트면서, 조금씩 바람이 들었다. 그런 나는 마치 친구들이 나를 불러 주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너무 쉽게 흔들렸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았던 친구들의 유혹이 너무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9월 평가원 모의고사가 다가왔고, 보란 듯이 나는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잘 읽히던 국어 지문이 읽히지 않았고, 술술 풀리던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았으며, 한 번도 1등급을 놓치지 않았던 영어마저 2등급으로 내려앉았다.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은 게 아닌데, 고작 몇 달 풀린 결과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약간의 긴장을 놓은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모든 게 나의 책임이었기에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몇 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짜내어야 하는데, 내려가는 점수는 날개 없이 비상착륙 하는 비행기처럼 곤두박질을 쳤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의 충격으로 나는 심하게 흔들렸다. 다시 재정비하여 공부에 전념하였지만,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고, 아쉽게도 의대를 지원하기에는 부족한 성적이 나왔다.
처음 재수를 시작할 때는 재학생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속력으로 달렸다. 결과도 잘 나와 만족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좋던 감각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처음부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끌어 썼는지, 가을에 접어들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조급한 마음에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것도 큰 이유였다.
나는 또다시 처참하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