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한 하루

by 표나는 독서가

요즘 나는
‘슬럼프’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무리 애써도 진척이 없는 날이 이어질 때
그 말은 꽤 그럴듯한 설명처럼 다가온다.

마치 지금의 상태를
한 단어로 정리해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안에 있으면
조금은 덜 애써도 될 것 같아서.

슬럼프.
심신의 상태 또는 작업이나 사업 따위가
일시적으로 부진한 상태.

사전은 슬럼프를 이렇게 정의한다.
분명 ‘일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단어를 꺼내는 순간
그 상태를 꽤 단단한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하던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진척이 없을 때
우리는 쉽게 말한다.

“나 요즘 슬럼프야.”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와 트로이군이
10년 동안 벌인 전쟁이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장의 상황은 수없이 바뀌었을 것이다.
이기던 날도 있었을 테고,
밀리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전세가 기울 때마다
장수나 병사들이
자신들에게 슬럼프가 왔다며
전장을 떠났다면,
이 전쟁은 과연
1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 시절에는
슬럼프라는 단어조차 없었지만,
목숨이 오가는 일촉즉발의 순간 속에서
그들은 그저
눈앞의 싸움을 이어갔을 뿐이다.

지금 우리의 전장은 다르다.
책상 앞에서,
글 앞에서,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요즘 안 풀려.”
“나는 원래 이 정도야.”
“슬럼프야.”

같은 말로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슬럼프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마음은 조금 편해진다.

그 대신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남아 있고
나는 거기서
잠시 서 있게 된다.

어쩌면 문제는
지금의 상태가 아니라
그 상태에 붙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다.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금은
과정이 되기도 하고,
머물러도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간을
슬럼프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사전이 말한 것처럼
이 상태가 정말 일시적인 거라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복잡하지 않다.

슬럼프라는 말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보는 것.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 시간은
그냥 지나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