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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Aug 29. 2020

28. 모디카의 잠 못 이루는 밤

<시실리  모디카에서 만난 인생 피자와 왕 레몬>

16, 17세기에 있었던 여러 번의 지진으로 피해를 많이 입었음에도 이탈리아에서 인기 있는 여행지로 뽑히는 시실리 남부의 조그만 마을 모디카(Modica)로 가는 길은 빗길의 연속이었다.


멈출지 모르고 성가시게 내리는 비와 관리를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도로 곳곳에 움푹 파인 많은 팟홀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가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모디카에 가고자 하는 여행자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늘 한 면을  빠지지 않고 장식하고 많은 미식가들의 순례지처럼 되어 있는 이 작은 마을의 매력이 과연 무엇인지 늘 가보고 싶었던 모디카다.


300년 전, 지진으로 거의 파괴된 마을을 당시 주를 이루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춘 모디카는 도시라기보다는 인구 5만의 조그만 마을로 삼면이 경사진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모디카 전경

지금은 이 언덕들이 많은 집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경사진 언덕들의 아래쪽은 분지 같은 지형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마을의 다운타운이 형성된 거꾸로 된 고깔 모양의 독특한 마을이다. 

경사진 언덕 위의 마을을 모디카 알타(Modica Alta), 마을의 아래 다운타운 지역을 모디카 바사(Modica Bassa)라고 부른다.

 

언덕 위의 모디카 알타 지역에 묶기로 한 숙소를 찾아가는 길평탄치 않았다. 경사면에 좁은 골목으로 연결된 지형적 특성으로 구글맵이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우리는 계속 주변을 맴돌며 반복하여 새 경로를 찾느라 기계나 운전자나 모두 지쳐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오늘 묵게 될 숙소. 

이곳까지 애써 찾아온 손님에 대한 배려인 듯 주인은 반갑게 문 밖에서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이탈리아인이 이토록 반가울 수도 있구나 하면서 비로소 운전대를 잡았던 손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 길들은 물론 일방통행이다. 

차 두대가 비껴갈 수도 없는 좁은 길들로 이어진 미로 같은 골목길들. 가로등 같은 건 아예 기대할 수도 없고 간간이 집 밖에 설치된 벽등이 가로등의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마을의 중심가로 가는 길을 묻자 주인은 길 이름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고 한다. 모든 길은 다운타운으로 통한다면서. 

'모든 길이 다운타운으로?' 여기가 이탈리아 임은 틀림없구나 싶었다. 

문제없다는 듯이 가볍게 답을 하는 그를 보면서 '사는 이들에게야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 같은 방문객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란다.' 하면서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하고 비 오는 밤, 숙소를 나섰다.


비 오는 저녁 모디카의 골목길


비 속에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굳이 찾아 나선 것은 모디카를 간다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은 식당에서 저녁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당 이름을 듣더니 숙소 주인도 자신도 단골로 가는 식당이라면서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나의 선택이 옳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정보 중에 어떤 때는 잘못된 정보에 실망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늘 실제를 확인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않는 조금은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지 좀 된 듯하다. 


계속 퍼붓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찾아 중세 마을의 어두운 골목길을 처벅처벅 걷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 많은 운전을 한 하루이기에 이 좁은 중세 골목을 다시 운전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지만 굳이 걷기를 고집한 것은 모디카의 유명한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다운타운의 야경

시실리를 소개하는 책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멋진 야경이 이곳에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금방 닿을 것 같은 다운타운의 밝은 불빛은 걷다 보면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걷다 보면 모디카의 수호성인 중 한 명인 성 조지(San Giorgio)의 오래된 성당도 만나게 되지만 비 오는 저녁 불 꺼진 대 성당의 모습은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지진으로 파괴되었던 성당이 재건축된 것은 1842년이다. 그러나 바로크 양식의 이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멋진 성당이다. 조그만 마을 모디카에는 성 조지 성당 말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14세기에 지어진 성당 성 피에트로(San Pietro) 성당도 있다. 성당 입구 계단에는 예수님의 12제자 동상이 서 있는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 성당이다.


성 조지 성당야경(좌)과 성 피에트로 성당(우)


성 조지는 유럽에서는 인기 있는 성인으로 커다란 창으로 악마나 용과 싸우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바로 그 성인이다. (https://brunch.co.kr/@cielbleu/41 참조)

다음 날 찾은 모디카의 문화센터에서는 현대화된 성 조지상이 전시되어 있어 시실리의 조그만 마을이 그냥 시골마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현대식으로 표현한 용을 물리치는 성 조지 부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마을의 다운타운에 들어섰다. 비 오는 저녁 굳이 모디카의 다운타운을 찾아온 것은 이곳의  자랑이라는 '라 콘테아(La Contea)'때문이다.

'라 콘테아' 입구와 실내


'라 콘테아'는 모디카를 대표하는 유명 피자 전문점이다.

이탈리아에서 피자가 뭐 대수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디카가 '슬로 푸드 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셰프 쥬세페 바로네(Guiseppe Barone)가 식당을 경영하는 곳이고 많은 미식가와 셰프들이 찾아오는 곳이란 걸 알고 나면 조금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모 방송사의 여행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고 이곳을 먼저 다녀온 친지들의 입소문들은 비 오는 밤이라 해도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순 없었다.  

메뉴에 적힌 많은 종류의 피자를 보면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망설이는데 친절하게도 반반 피자를 추천해 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라  콘테아'가 추천한 반반 피자

슬로 푸드를 지향하는 도시답게 내 눈앞에 놓인 신선한 재료가 듬뿍 올라간 피자를 보는 순간 '이것은 피자인가? 요리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며 보는 눈이 너무 즐겁다.


피자 한쪽을 잡으니 피자 도우가 늘 먹던 도우 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너무 부드러운 도우는 마치 말랑말랑한 만두피를 연상시킨다. 

지금까지 먹어 왔던 피자는 도우 위에 여러 재료가 놓여 있다고 생각하고 먹었는데 이 피자는 도우가 재료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일체감이 한 입 먹는 순간 입안에 확 퍼진다. 

제각각 자태를 뽐내며 피자를 장식하고 있던 재료들은 입안에 넣은 순간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 듯 부드럽게 씹히다가 서서히 자신들만의 맛과 향을 이쪽저쪽에서 발산하기 시작한다. 

씹히는 재료가 무엇인지 분석하려 하지 말고 씹히는 대로 식감의 다름을 인정해주면 된다. 그들이 이루어 내는 하모니는 그들의 역할이고 우리는 그것을 기분 좋게 먹으면 되는 것. 동행한 친지와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하면서 열심히 피자 한판을 게눈 감추듯 먹어 버렸다.


화덕 피자지만 장작으로 불을 때는 것이 아니라 시실리 특산인 아몬드 껍질을 태워 피자를 굽는 다 했고  피자 반죽은 돼지기름과 천일염으로 24시간 숙성을 한다는 등 '라 콘테아'에 관해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모두 이해가 가는 저녁이었다.

기대 이상의 맛에 오히려 이런 인생 피자를 만들어 준 셰프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아몬드 화덕이 있는 라 콘테아 주방


맛에 대한 생각이야 개인차가 있으니 서로 다를 수도 있겠으나 여행을 마친 후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행한 친지와 이 곳의 피자는 인생 피자였다고 서로 동감하는 것을 보면 '라 콘테아'의 피자가 특별했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언덕 위에서 부터 비속을 뚫고 찾아왔는데 식당 문을 나서려는데 박스 포장을 들고나가는 이가 있다. 

테이크 아웃인가? 하는데 밖에서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딜리버리였다. 유럽에선 흔하지 않은 딜리버리를 하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나도 시켜 먹었 것을. 상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누가 일일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먹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다 와서 먹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 말고.

모디카 같은 지형에선 꼭 필요한 현명한 판매 전략이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를 하니 피자를 굽던 주인이 직접 나와 인사를 한다. 솜씨도 좋은 양반이 친절하기까지 하다.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 같이 찍어주니 비 오는 밤의 모디카 방문은 더욱 특별해진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데 숙소로 올라오는 중간중간 내려다보는 야경은 그야말로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하다. 인적이 뜸한 골목들이 약간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건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황홀한 야경들은 그런 걱정은 던져 버리라고 위로를 하는 듯하다.

비가 오면 어떻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고 올라가면 어떠랴.

사진으로만 보던 아름다운 야경이 온통 내 차지가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는 멋진 밤이다.


모디카를 대표하는 야경, 중앙에 성 조지 성당이 보인다.




밤 새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깊은 잠을 설친 다음 날 아침.

두꺼운 커튼 사이로 가는 아침 햇살이 수줍게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비가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화창한 아침을 데리고.


모디카 숙소의 오렌지와 레몬이 가득한 정원


창 문을 여니 청명한 햇살과 함께 향긋한 오렌지 향이 코를 간질인다.

창 밖은 온통 오렌지와 레몬 나무가 울창한 정원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었다. 어제는 늦은 도착으로 이런 정원을 미처 감상할 여유도 없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된 식당으로 들어서니 할아버지 한 분이 열심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장의 아버지시란다.

정원에서 직접 따온 오렌지로 만든 생 주스와 레몬 쨈들로 차려낸 아침은 마치 버틀러의 서비스를 받으며 먹는 거 같아 간단한 조식이 아닌 정찬 같은 느낌마저 든다.


소소하지만 신선한 아침


그런데  오렌지 나무 가득한 정원에서 유난히 큰 레몬이 눈길을 잡았다. 모양은 레몬인데 너무 커서 레몬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저건 별종인가요?' 하고 물으니 이 왕 레몬의 이름은 '체드로(Cedro)'라고 친절하게 답해 주신다.

왕 레몬인 체드로는 일반 레몬보다 과육이 많아 리조또에 넣어 요리하면 좋다는 설명까지 자세하게 해 주신다. 그러면서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정원에서 싱싱하고 잘 생긴 체드로를 하나 따서 건네주신다. 원하면 오렌지도 따 가란다.

넉넉한 인심에 어제 고생하며 언덕을 올라온 보람이 있었네 하며 정말 예쁜 오렌지도 몇 개 땄다.


체드로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
체드로와 일반 레몬 비교

그런데 여기서 본 체드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실리 여행의 마지막에 어린아이 머리만 한 거대한(?) 체드로를 보았으니 말이다.

시실리 카타니아에서 본 대왕 체드로


모디카에 오면 들러야 하는 곳으로 이름을 올린 초콜릿 가게가 있다.

' Antica Dolceria Bonajuto'.

18세기부터 6대에 걸쳐 초콜릿을 만들고 있는 보나유토(Bonajuto) 가문은 시실리에서 가장 오래된 초콜릿 가게이며 이탈리아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초콜릿 가게 중 한 곳으로 뽑힌다고 한다. 이 집의 특징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특수한 초콜릿 가공 밥법에 있다.

16세기 스페인이 멕시코의 아즈텍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곳의 원주민들의 카카오 먹는 법을 들여와 그 방법대로 시실리에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현재 먹는 부드러운 초콜릿 하고는 거리가 멀다. 카카오 본연의 맛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그들만의 특별한 방법(cold-working)은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맛(식감이 딱딱하다)이지만 고추 라던가 소금을 넣은 특이한 초콜릿을 한 번쯤 시식해보는 것은 이곳까지 찾아온 여행객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보나유토 가게 입구(좌)와 여러 종류의 초코렛 시식 코너(우)


마을 중심가인 움베르토(Umberto) 길에는 중세적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멋진 책방도 있다. 벽화가 특이한 이 곳엔 모디카의 명성에 어울리게 요리책도 많이 진열되어 있어 그들이 지향하는 요리법도 보면서 다리 아픈 여행객이 한 숨 돌려가기에 안성맞춤이다. 

벽 장식이 독특한 모디카 중심가의 책 방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보고 하는 것이 여행의 매력일 텐데 그것들이 맛있는 식사와 멋진 풍경,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시실리 내륙, 오지라면 오지라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 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모디카!

언젠가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시실리의 작은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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