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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Aug 16. 2020

27. 1000년 전 프랑스를 뒤흔든
러브 스토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파리의 센 강가에는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던 인물과 그에게 사사 받던 어린 제자 간의 쇼킹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로서는 워낙 충격적인 이야기라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들이 남긴 족적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파리의 센강, 노트르담 사원이 있는 시테 섬(Ile de la Cite)에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1000년 전 지냈던 집이 오랜 세월 속에 재건되고 리모델링되면서 아직 까지 남아 있다. 

화재 복구 중인 노트르담 사원과 센 강가의  '께 오 프레르'

2019년 4월, 대형 화재로 세계인들의 마음을 참담하게 했던 노트르담 사원을 뒤로하고 센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길 '께 오 프레르(Quai Aux Fleurs)'가 있다.

이 길 9번지에 있는 맨션이 바로 그곳이다.

1000년 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누고 숱한 이야기를 남긴 채 떠난 두 연인이 기거했던 곳이라는 안내판을 자랑스럽게(?) 걸고 이야기를 따라 찾아온 많은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께 오 프레르(9 Quai Aux Fleurs)' 입구


이 대단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은 당시 파리 철학계의 거두였던 39살의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1079-1142)와 17살의 어린 제자 엘로이즈(Héloïse:1100-1164)다.


아벨라르(상)와 엘로이즈(하)의 부조


어느 나라나 비슷한 상황이었겠지만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던 1000년 전 파리.

나이 스물도 안된 어린 엘로이즈는 라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한 데다 학식도 높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그녀를 궁금해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14세기 작품, 샹티 성(꽁데 뮤지엄)

당시 이미 파리 철학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스콜라 철학자 아벨라르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엘로이즈의 가정교사를 자원하게 되고 그러던 중 두 남녀 사이에는 20여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정이 싹트고 결국엔 넘어선 안될 선까지 넘게 되었다. 

성직자에게 결혼은 금기시되었던 터라 성직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아벨라르는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던 나머지 임신한 엘로이즈를 브르타뉴의 누이 집으로 피신시키고 거기서 엘로이즈는 아스트로라베(Astrolabe)라는 아들을 낳았다. 


1000년 전의 사회 현실은 처녀가 아이를 나았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더구나 상대가 스무 살 연상의 성직자라는 것은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서로의 입장을 고려한 결과 그 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결혼을 비밀에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법.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한 엘로이즈의 숙부는 사람을 시켜 아벨라르를 거세시키고 

엘로이즈는 파리 근교에 있는 아르장퇴유(Argenteuil)의 수도원으로 보내지고 거세당한 아벨라르는 그의 본분으로 돌아가 성직자와 철학자로서의 삶에 정진하게 되었다.


이런 난리 후 격리된 그들은 다시 연인으로서의 만남 없이 죽을 때까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들이 자의던 타의던 헤어져 살던 나머지 삶의 시간 동안 주고받은 4통의 사적인 편지와 3통의 'Letters of Direction'이라는 편지가 남아 있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인 사이에 주고받은 연애편지로 보기엔 너무나 학구적인 내용들이 많아 100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이 편지가 과연 그들이 실제로 쓴 것인지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많고, 솔직한 그들의 표현 속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의 깊이를 논하는 이들도 많다.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을 언급할 때 그들은 아벨라르를 떠 올릴 것이다.'라고 써 내려간 엘로이즈의 절절하면서도 솔직 담대한 글은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것은 아벨라르라는 남자이지 그의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페미니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반면 아벨라르는 '내가 후세에 기억된다면 엘로이즈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라는 글을 남겨 둘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그는 후에 둘 사이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정에 의한 것이었음을 명시하면서 둘 사이의 애정 행각에서 그녀의 무고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게 아닌가 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엘로이즈에게 진정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충고하게 되고 그의 가르침 때문인지 결국 엘로이즈는 자신이 격리되어 있던 수도원의 수녀원장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 

사랑했던 어린 연인에 대한 연장자의 마지막 배려라고 볼 수 있을는지.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의 수도원에서 1122년 아벨라르가 세운 상파뉴에 있는 '파라클레트 오라토리(Oratory of the Paraclete)' 수도원으로 옮기게 되고 후에 그곳의 수녀원장이 되었는데 그 뒤 1142년 아벨라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이 수도원에 보관하다가 1164년 그녀가 세상을 뜬 후에는 아벨라르의 옆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설이 분분한 가운데 둘의 시신은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파라클레트 오라토리'에 묻혀 있다가 수도원이 파괴된 후에 근처 '노정 슈흐 센(Nogent-sur-Seine)'으로 이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두 사람은 1817년 파리에서 가장 큰 정원식 공동묘지인 페흐 라셰즈(Père Lachaise)로 이장되어 아름다운 캐노피 아래에서 영면에 들었다.

어느 시대든 금지된 사랑도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있지만 1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많은 예술 작품과 파리지앵들의 주변에 남아 자주 회자되는 이 연인의 이야기는 파리의 페흐 라셰즈 공동묘지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페흐 라셰즈에 있는 캐노피로 장식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지
묘지 안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석관


기록에 남은 그들의 러브 스토리 영향인지 이 캐노피에는 연인이나 실연한 이들이 사랑의 편지를 넣어 두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흥미로운 속설이 전해지고 있어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연인들에게는 파리의 뤽상부르 정원(Jardin du Luxembourg)의 '사랑의 분수'(https://brunch.co.kr/@cielbleu/244 참조)와 함께 인기 방문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공동묘지와 러브 스토리라니 역시 스토리텔링에 뛰어난 프랑스인들이다. 

갈라테아와 아시스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뤽상부르 정원의 '사랑의 분수'

파리 시내 동쪽 20구에 있는 페흐 라셰즈는 루이 14세가 고해성사 하던 신부가 살았던 곳으로 나폴레옹이 1804년 파리 시민이면 누구나 묻힐 수 있도록 하자는 모토로 만든 파리 최대의 공동묘지다. 그러나 초기에는 도심과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페흐 라셰즈의 입구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 위치(빨간 화살표)

이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프랑스인들에게 인기 있는 사랑 이야기 주인공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유해(그냥 '노정 쉬흐 센'에 남아 있다는 주장도 있음)를 옮겨 오는가 하면 이솝 우화와 양대 쌍벽을 이루는 프랑스 우화의 아버지 '라퐁텐(Jean de La Fontaine)'과 프랑스 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극작가 '몰리에르(Moliere)'의 묘지를 조성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적 유명 인사들을 비롯  백만 구가 넘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 묻히고자 대기하는 유골도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세계 최대의 도시 파리에 묻히고자 하는 마음은 과거 교회의 땅에 묻혀 조금이라도 더 은혜를 받고자 했던 마음이나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싶다.



회화에 남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모습은 중세 유럽의 유명한 또 하나의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파올로와 프란체스카(https://brunch.co.kr/@cielbleu/142 참조)'의 모습과 유사하게 그려지곤 한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다고는 하지만 둘 다 비극적 사랑의 결말이라 그런지 화가들에게는 동일한 동기 부여가 되었나 보다. 너무나 유사한 구도에 주인공들의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1819, Jean Vignaud(상),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1819,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진한 여운을 남기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던 아니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결말 때문이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소설 같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사랑놀이는 제 3자에게는 흥미로울 수 있으나 정작 본인들에게는 고통의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절박한 사연은 작품의 중심에서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지만 많은 대가들은 곧 다가 올 비극을 작품 속에 암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까지 읽어 내는 것은 온전히 우리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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