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여겼던 일들에 하나 둘 장막이 드리우더니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날들이 길어지자 랜선 여행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쉬어가는 마음으로 수북이 쌓인 지난 여행의 기록들과 자료들을 정리하던 중 화려한 색감으로 눈길을 잡은 곳이 있었으니 프랑스의 지베르니(Giverny)다.
지베르니 마을 안내 지도
조용한 지베르니 마을
파리 북서쪽에 위치한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차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조그만 마을이다.
이 조용한 마을은 세계적인 명소를 품고 있는데 바로 '모네의 집'이다.
모네(Claude Monet:1840-1926)가 워낙 유명 인사다 보니 '지베르니'라는 지역명이 '모네의 집'으로 알려져 버렸다.
조용한 마을에 세계적 화가인 모네의 손때가 30년 넘게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집과 그가 정성으로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정원, 모네의 대작 '수련'이 그려진 연못이 있고 그뿐 아니라 마을의 조그만 교회 뒤 공동묘지에 모네의 가족 묘지가 있으니 가히 '모네의 마을'이라 불릴만하다.
파리를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모네에 열광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방문 행렬은 잠시 이곳이 일본인지 프랑스인지를 헷갈리게 할 정도다.
모네의 집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수많은 꽃들로 사진 속의 배경 색깔이 달라지는 이 정원은 현실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풍성한 색채의 향연을 보여준다.
프랑스인 친구는 지베르니 사진을 보면 어느 계절의 사진인지를 알아맞힐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떠는데 지베르니를 방문해 보면 그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많은 정원사들의 관리 아래 모네의 정원은 철마다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벌일 수 있는 것이며 모네의 생전에도 이미 7명의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원을 거니는 모네의 생전 모습 사진
현재도 정원을 열심히 가꾸고 있는 정원사들
'프랑스 정원'하면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조경 건축가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https://brunch.co.kr/@cielbleu/8 참조)'가 만든 자로 잰 듯한 정원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곳은 그의 정원처럼 규격화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잘 가꾼 정원의 모습으로 오히려 현실감 있는 친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저 아름다운 꽃들에 취해 '너희 참 예쁘다.'라고 해주면 되는 정원이다.
그래서 마치 이웃의 정원 같은 친밀감을 주면서도 수많은 꽃들이 만들어 내는 화려한 색감은 사진 속에서조차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모네의 집 앞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장미
사람들이 서 있는 2층 창문이 모네의 침실이다.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신혼살림을 차렸던 베흑뙤이(Vétheuil:지베르니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를 떠나 1890년 이곳에 정착한 모네는 1893년에는 옆의 땅까지 매입하여 연못을 만들고 그곳에서 1899년부터 그의 마지막 역작인 수련 연작을 그리기 시작하여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6년을 이곳에 살았다.
모네의 집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정원의 모습
모네의 침실에서 창문을 열면 이런 정원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보통 사람도 이런 경치를 보면 힐링이 되고 마음이 순화될 터인데 하물며 예술가들의 영감이야 얼마나 자극을 받았겠는가?
아름다운 정원을 마음껏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쉬어도 가고 그러다 이젤을 메고 연꽃이 만발하고 버드나무 가지가 춤을 추는 연못으로 향했을 모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모네의 집에서 연못으로 가는 길의 정원
'모네의 집' 투어를 하다 보면 그의 아틀리에와 식당에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 미술 장르인 '우키요에(Ukiyo-ye)' 작품들이 많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고흐의 그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일본 작품들이다.
우키요에 그림들이 걸린 모네의 식당(위키미디어)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일본에서 유행한 미술 장르로 '우키요에'는'떠다니는 세상의 그림'이란 뜻으로 현세 삶의 여러 모습을 그려낸 그림이다.
우키요에는 처음에는 마을의 일상생활이나 게이샤, 스모 선수들과 유명한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를 비롯 예술 공연 등을 주제로 많이 그려졌으나 후에는 우키요에의 대표 화가 호쿠사이의 작품처럼 풍경화가 많이 그려졌다.
모네는 첫 번째 아내였던 까미유를 모델로 '기모노를 입은 까미유'를 그리기도 했다.
일본에선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장르가 오히려 유럽과 특히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인데 '우키요에'가 프랑스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아이러니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일본 도자기가 인기였는데 일본 도자기의 포장지에 우키요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전혀 새로운 기법의 그림에 환호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이 컸으니 모네의 연못 위에 1895년 일본식 다리가 놓인 것도 우연은 아닌 듯싶다.
왜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이곳을 인상파의 성지인 듯 방문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 한편으론 '일본 도자기' 하면 우리도 할 말이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든다.
'기모노를 입은 까미유',1876년, 모네, Museum of Fine Arts, Boston
모네의 집에 걸려 있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25년작(후가쿠 36경 중 하나)
'아틀리에의 모네', 모네의 집
정원에는 많은 종류의 꽃들이 철에 맞춰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데 일일이 이름을 나열하기도 어렵다.
이름 모를 꽃들도 많고, 그중에는 실제로 프랑스가 원산지가 아닌 꽃과 나무들도 많다. 그런 이유로 모네가 정원과 연못을 조성할 때에 동네 주민들의 반발이 많았다고 한다. 장미나 튤립 등은 흔히 보기 힘든 색깔이나 모양들을 쉽게 볼 수 있어 이런 호사가 없지 싶다.
모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최애 꽃 파피(불어는 '코클리코(coquelicot)'다)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만개한 정원의 코클리코
Coquelicots, La Promenade,1873, Musee d'Orsay
정원을 지나 연못에 들어서면 연못의 풍경은 그림보다 더 그림 같아 보인다.
연못과 나무의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로 치렁치렁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연못에 한 발을 담글 정도로 잘 자라 있고 울창한 대나무 숲과 연못 위에 가득 피어난 연꽃들과 이름 모를 꽃들의 향연은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듯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
모네의 울창한 연못 풍경
무성한 버드나무 밑으로 일본식 다리가 놓여 있는 모습은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과 똑같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다리에 올라가 서 보고 싶어 하여 다리 위는 항상 붐빈다.
그러나 실은 다리의 건너편에서 감상하는 연못의 모습이 더욱 멋지다. 무엇이던 한 발자국 떨어져 봐야 진정한 모습이 보인다는 진리는 여기서도 통한다.
모네는 30여 년 동안 250편에 이르는 수련을 그렸는데 빛에 너무 집중해서인지 그가 말년에 백내장으로 고생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연못 위의 실제 다리(상), 'Water Lilies and the Japanese Bridge',1897-1899, Princeton Univ. Art Museum(하)
파리의 오랑쥬리 뮤지엄에는 시간대 별로 그린 8개의 수련 대작이 두 개의 타원형 전시실에 널찍하게 전시되어 있다. 무한대 표시와 같은 모양의 두 타원형 방의 구조와 아침의 수련, 석양의 수련 등 수련 작품을 시간대 별로 배치한 모네의 대작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오랑쥬리 뮤지엄의 수련 전시실(아침 수련(좌), 석양의 수련(우))
그러나 아름다운 꽃들 뒤에는 모네 가족의 슬픈 사연도 있다.
인상파 화가 중 생전에 성공한 유일한 화가인 모네.
그러나 그가 성공가도를 달리기 전 그와 어려운 시절을 같이한 모네의 첫 아내인 까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1847-1879)는 일찍 세상을 뜬다.
가난한 화가였던 모네의 모델로 처음 만난 까미유는 모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둘째 아들을 낳고 얻은 자궁암으로 병마에 시달리다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이다.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더 힘들었던 것은 남편 모네와 그의 후원자였던 호슈데(Ernest Hoschedé)의 부인이었던 앨리스와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다.
사실혼 관계였으나 정식 결혼식(신부님 앞에서 거행하는 식)을 못 올린 이들의 사정을 알고 있던 앨리스는 그녀가 죽기 며칠 전에 신부님을 초대하여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까미유는 그들의 신혼집이 있었던 베흑뙤이의 공동묘지에 홀로 쓸쓸히 묻혔는데 그녀의 묘지명에는 '화가 모네의 아내 까미유 동시외'라고 쓰여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물론 모네의 작품(?)이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을까? 모네는 숨을 거둔 까미유의 얼굴을 그리면서 친구에게 '그녀가 세상을 떴는데 나는 이렇게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네.' 하는 한탄 섞인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의 이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이곳 지베르니에서는 그녀의 흔적을 볼 수 없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1892년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앨리스는 까미유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것을 결혼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수고에도 우리가 어렵지 않게 까미유를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마도 50여 편의 모네의 작품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 때문이리라.
Camille Monet on her deathbed, 1879, Musée d'Orsay, Paris
눈이 호강하는 꽃들의 향연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면 길 이름마저도 '클로드 모네(rue claude monet)'라고 명명된 조용한 동네 길을 걷게 된다.
숲 속 한편에는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모네의 흉상도 볼 수 있다.
마을 길을 걷다 보면 포스가 느껴지는 오래된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호텔 보디'다.
19세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세잔을 비롯 매리 카셋 등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머물렀던 'Ancient Hotel Baudy'다. 현판에 적힌 방문객들의 이름을 읽다 보면 모네를 비롯 당대 내노라는 인상파 화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대단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호텔을 겸한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호텔 보디와 많은 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
20세기 초 호텔 보디와 지베르니 마을 사진
호텔 보디를 지나 길을 따라 좀 더 걷다 보면 길의 끝자락에 모네의 무덤이 있는 조그만 동네 교회를 만나게 된다. 교회 공동묘지에는 소박한 모네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교회 공동묘지의 모네 가족묘
그야말로 지베르니는 모네에서 시작해서 모네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마을이다.
지베르니 마을 사람들은 처음 모네가 연못을 조성한다고 하자 심하게 반대했다고 하는데 뭐든 새로운 변화에는 반대가 있는 법인가 보다.
지금은 지베르니가 인상파의 성지처럼 되어 있으니 당시 반대했던 주민들이 오늘날 이곳을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한 마음도 든다.
너무 많은 관광객은 사절이라는 현지인들의 시위가 심심치 않게 뉴스로 전해지고 있는 세태로 보아 여전히 반대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 복에 겨운 생각이다. 이제는 관광명소들이 모두 문을 닫아걸었으니 말이다.
돌아오는 봄에도 이곳의 꽃들은 세상사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꽃망울을 피울 테고 방문객이 없는 정원은 모네가 살던 그 시절로 돌아가 오랜만에 조용함을 만끽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