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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Apr 25. 2021

31. 운명적 만남으로 역사에 남은 두 사람

보니 프린스와 플로라 맥도널드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역사에 깊은 자취를 남긴 두 남녀가 있다.

영국의 왕위를 되찾으려는 왕족 보니 프린스와 그를 도운 스코틀랜드 유력 가문의 아가씨 플로라 맥도널드가 그들이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과 이별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전설같이 내려오는 이야기로 스코틀랜드 북서쪽의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스카이(Skye) 섬에서 시작된다.


엘리자베스 1세(좌)와 매리 스튜어트 여왕(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에게 신변 보호를 청한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매리 스튜어트 여왕(https://brunch.co.kr/@cielbleu/126 참조)을 참수형에 처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손이 없자 영국의 왕위는 자신이 참수형에 처했던 매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1세에게 넘어간다.

이미 제임스 6세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그는 제임스 1세로 동시에 영국 왕에 즉위하면서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최초로 스튜어트(Stuart) 왕가를 열었다.

이때가 17세기 초(1603-1625)다.


이번 이야기의 두 주인공의 시대적 배경은 1746년이니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른 후 1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왜 스튜어트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보니 프린스가 왕좌를 놓고 영국과 큰 전쟁을 치러야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제임스 1세 이후로 왕위에 오른 스튜어트 왕가의 왕들은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당하기도 하고 명예혁명 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는 등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내다 결국 최초의 대영제국(Kingdom of Great Britain) 여왕인 앤 스튜어트 여왕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긴다. 그녀는 1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불운하게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때가 18세기 초다.


앤 여왕의 후임으로 이복동생인 제임스( James Francis Edward Stuart)가 있었으나 영국 왕실은 스튜어트 왕가의 먼 친척인 독일의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에게 왕위를 넘긴다. 앤 여왕이 개신교였는데 반해 이복동생인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제임스를 지지하는 스튜어트 왕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권 계승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서는데 바로 이복동생 제임스의 아들이  보니 프린스다.




보니 프린스, 그의 정식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Charles Edward Stuart:1720-1788)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그를 '보니 프린스 찰리(Bonnie Prince Charlie)', 애칭으로 '보니 프린스'라고 부른다.

'보니'는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예쁘다'는 뜻이라고.



보니 프린스, 1745, Allan Ramsay, National Galleies of Scotland



스코틀랜드는 가톨릭, 영국은 개신교.

종교도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영국에게 많은 시달림을 당한 스코틀랜드 인들은 정당성이 충분한 왕위 계승 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하노버 왕가를 쫓아내고  원래대로 스튜어트 왕가를 이어가야 한다는 스코틀랜드 인들의 반란이 시작되는데 이들을 '자코바이트'라고 부른다.

'자코바이트'는 영국 최초의 스튜어트 왕이었던 제임스 1세의 라틴어 이름 'Jacobus(자코부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영국 왕권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 세력을 통틀어 '자코바이트(Jacobite)'라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한 자코뱅(Jacobins)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


보니 프린스는 예쁜(?) 얼굴에 말 수완도 좋아 많은 자코바이트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과 자코바이트 군대는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인버네스(네스호의 괴물로 유명한 그 호수다.) 근처 컬로든 평원에서 1746년 4월 16일 대 혈전을 벌이게 되고.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자코바이트는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완패하지만 영국군의 피해는 아주 미미했다.

영국군은 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인데 반해 자코바이트 군대는 칼과 도끼로 무장한 의병 수준의 용병들이었다. 전투지가 허허벌판인지라 보니 프린스를 지지하는 장군들 조차도 총과 칼의 대결로는 승산 없는 전투라고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치러진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자코바이트의 저항은 이 전투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승리한 영국군은 패잔병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협조했던 자코바이트의 색출을 위해 스코틀랜드 인들을 공포스럽게 핍박하였다고 한다.

당시 생사가 갈린 포로들의 절박한 상황은 스코틀랜드의 민요 'The Bonnie Banks of Loch Lomond'(https://www.youtube.com/watch?v=p0KQLJwMDzc 참조)로 남아 지금도 스코틀랜드 인들의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로몬드 호수(Loch Lomond)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호수다.


13세기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영웅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1270-1305)를 잔혹하게 처형(알몸으로 말 뒤에 매달고 달리고, 장기를 적출하고, 사지 절단하는 등 차마 글로 옮기기도 힘듦)했던 영국은 컬로든 전투의 압승 후에도 또다시 피바람을 일으켜 스코틀랜드의 반 잉글랜드 감정에 다시 불을 붙이고 말았다.

윌리엄 월리스는 영화 브레이브하트(Braveheart)의 실제 주인공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에는 당시 기록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컬로든 박물관이 많은 방문객들에게 그날의 처참했던 현장을 가감 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컬로든 전투 현장
박물관의 전시실
영국군의 프런트 라인을 나타내는 빨간 깃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안내판


컬로든 전투 패배로 거액의 현상금(당시 3만 파운드)이 걸린 보니 프린스는 스코틀랜드 서쪽의 조그만 섬 유이스트(South Uist)까지 숨어들게 되고 그곳에서 지역 명문가의 아가씨 플로라 맥도널드(Flora MacDonald:1722-1790)를 운명적으로 만나 드라마틱한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보니 프린스는 26세, 플로라는 24세로 피 끓는 젊은 남녀였다.


자코바이트의 상징 흰 장미를 단 플로라 맥도널드, 1749, Allan Ramsay, Ashmolean Museum, UK

플로라의 아버지는 당시 이 지역 사령관으로 보니 프린스 일행의 도피에 필요한 통행증을 발행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맥도널드 집안은 자코바이트를 지지하지 않는 가문이었고 그 집안의 아가씨인 플로라가 집안에 피해가 될 수 있음을 알고도 과감히 왕자의 탈출을  도왔다는 점은 선뜻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용감하게 보니 프린스의 탈출을 도운 플로라의 용기가 스코틀랜드 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듯싶다.


막대한 현상금으로 쫓는 눈이 많아지자 보니 프린스는 기상천외하게도 플로라의 여시종 베티 버크(Betty Burke)로 변장하여 탈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녀로 여장한 보니 프린스, 1746, J.Williams, National Galleries Scotland


여장을 한 보니 프린스는 유이스트 섬에서 보트를 이용해 지금의 킬뮤어(Kilmuir:오늘날 이곳은 'Prince's Point'라고 부른다.)를 거쳐 포트리(Portree), 라세이 섬(Island of Raasay)을 거쳐 배를 타고 프랑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목숨을 건 위험한 여정을 같이 한 플로라와 보니 프린스는 포트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컬로든 전투지에서부터 보니 프린스의 탈출 경로(좌)와  그의 스카이 섬 탈출을 그린 그림(우)
Flora MacDonalds farewell to Bonnie Prince Charlie, George W. Joy

그들을 태웠던 보트 뱃사공의 밀고로 플로라는 체포되어 악명 높은 런던탑에 갇히지만 스코틀랜드 최고의 변호사의 변호 덕에  풀려나고 몇 년 후인 1750년 맥도널드 가의 청년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지역 정착에 실패한 그녀는 1780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다 1790년 68세로 세상을 뜨고 킬뮤어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명을 보면 스코틀랜드 인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묘비명에는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며 용기와 신의가 미덕이라면 명예롭게 불려질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들의 이별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플로라의 시신은 보니 프린스가 사용했던 담요에 싸여 매장되었다고 하니 후세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자극받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킬뮤어 공동묘지의 플로라 묘지와 그녀의 묘비


반면 보니 프린스는 스카이 섬을 탈출한 뒤 30여 년을 염문만 뿌리는 생활을 하다가 1772년 52세가 되어서야 32년 연하의 루이스라는 여인과 정략결혼을 했다.

보니 프린스는 이 결혼으로 교황이 본인을 영국의 왕으로 인정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고 반면 루이스는 자신이 영국의 왕비로서 대접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두 사람의 기대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결혼 생활은 순조로울 수 없었고 보니 프린스는 1788년 67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그가 태어난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바티칸 성당에 안장되었다.

말년의 보니 프린스, 1785, Hygh Douglas Hamilton,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어린 여자의 몸으로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젊은 왕자 보니 프린스를 도왔다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건 아닐까?


스코틀랜드에는 컬로든 전투와 보니 프린스를 주제로 한 많은 구전 가요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보니 프린스의 스카이 섬 탈출을 노래한 'The Skye Boat Song(https://www.youtube.com/watch?v=4GxCjoZ5yLQ 참조)'은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 '아웃랜더(Outlander)'의 사운드트랙으로 쓰였다.


많은 후세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하에 미술가는 그림의 주제로, 작가는 소설의 주제로 서슴지 않고 그들을 불러오곤 하나 보다.


그러나 보니 프린스와 플로라는 스코틀랜드 역사에 진한 자취를 남긴 주인공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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