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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May 23. 2021

32. 청년 피카소의 첫 개인전이 열린 카페

바르셀로나 엘스 콰트레 갓츠

피카소(1881-1973)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5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 작품 110개가 전시된다고 한다. 코로나 19로 답답한 일상에 참 반가운 소식이다.

피카소의 여인 중 한 명인 마리 테레즈의 초상화가 실린 포스터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 Paris)은 파리 마레 지구(Le Marais)에 있는 17세기 건물 오텔 살레(Hôtel Salé)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피카소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피카소의 유족들이 상속세를 대신하여 기증한 그의 작품과 소장품들로 가득한 그야말로 피카소 예술 세계의 보고라 하겠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 입구와 내부

피카소 미술관은 5년여의 긴 리모델링 공사로 휴관됐다가 2014년 10월 25일 피카소의 생일에 맞춰 재개관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가운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서던 날의 기억이 새롭다. 

피카소 미술관의 작품들 가운데는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그의 1951년작 '한국에서의 학살'도 전시되어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 피카소


다양한 분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 내부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소장품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소장품들 또한 대단한 작품들이다. 소장품의 대표 작가들이 대충 호안 미로, 앙리 마티스, 고갱, 세잔 등이니 말이다.

'Marguerite', 1906, Henri Matisse(좌), 'Spanish dancer',1921,Joan Miro(우)

 피카소의 작품 중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을 그의 독특한 해석으로 그려낸 작품은 100여 년의 시차가 예술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생각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Le  déjeuner sur l'herbe, after Manet', 1960,  Picasso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Édouard Manet, Musée d'Orsay

남불 여행 중 방문했던 앙티브(Antibes)의 피카소 미술관과는 규모나 소장 작품들의 격이 다른 미술관이었다. 프랑스의 고성(Château)을 좋아했던 피카소는 프로방스의 조그만 도시 앙티브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그리말디 성(Château Grimaldi)에 아틀리에를 갖고 있었는데 피카소는 그곳에서 만든 작품들을 그리말디 성에 남기는 조건으로 그리말디 성을 아예 피카소 뮤지엄으로 명명하기로 했단다.

거장의 힘이다.

앙티브 피카소 박물관과 박물관 앞의 지중해 전망




그의 이름 앞에는 '최고'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너무 커서 범접하기 어려운 그의 명성과 함께  피카소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던 바르셀로나의 작은 카페를 떠올렸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그의 생애 첫 전시회를 열었는데...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화려한 거리 람블라(La Rambla)의 뒷골목에 자리한 조그만 카페, '엘스 콰트레 갓츠(Els Quatre Gats)'가 그곳이다.

직역하면 '네 마리 고양이'란 뜻이지만 카탈루냐어로 '소수의 사람들'이란 속뜻을 가지고 있단다. 카페 창립 멤버들의 프로필을 보면 '소수의 사람들'이란 당시 카탈루냐의 모더니즘을 리드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엘스 콰트레 갓츠'의 간판

처음 이 카페를 알게 된 것은 몽마르트의 뮤즈인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https://brunch.co.kr/@cielbleu/30 참조)의 사생아 모리스 유트릴로(Maurice Utrillo:1883-1955)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당시 많은 몽마르트의 화가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던 수잔 발라동이 사생아를 낳자 처음에는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가 아버지가 아니겠느냐는 루머가 돌았다고 한다. 수잔은 그의 작품 속의 단골 모델이었기도 했지만 그녀의 출산 소식을 듣고 르누아르 부부가 큰 부부싸움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다. 


아버지가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화끈(?)하게 자신의 성을 수잔 발라동의 사생아에게 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미쿠엘 유트릴로(Miquel Utrillo:1862-1934)다. 

그는 어려서 프랑스로 이주한 후 스페인과 파리를 오가며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최초로 개최된 세계 박람회가 핫한 이슈였는데 미쿠엘은 후에 1932년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예술 감독을 맡기도 한 인물이다.

결혼 전력이 있음에도 그의 프로필에는 수잔 발라동이 파트너로 이름이 올라가 있어 두 사람 간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몽마르트의 유명 카페 '르 샤 누아(Le Chat Noir: 검은 고양이)' 같은 카페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오픈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일조를 한 인물이다. 

그 카페가 바로 '엘스 콰트레 갓츠'다.

 

'르 샤 누아' 포스터, 1896, Theophile Steinlen
왼쪽 벽면에 '르 샤 누아' 포스터가 걸린 '엘스 콰트레 갓츠' 카페 내부

'르 샤 누아'는 1881년 공연 기획자인 로돌프 살리(Rodolphe Salis)가 오픈한 세계 최초의 카바레 스타일 카페로 손님은 좌석에 앉아 무대의 공연을 관람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지금은 흔한 스타일이지만 당시로선 새로운 카페 운영방식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엘스 콰트레 갓츠'는 파리의 '르 샤 누아'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빼레 로메우(Pere Romeu:1862-1908)가 바르셀로나의 모더니즘 아티스트들의 모임을 위한 사랑방으로 구상한 카페다. 그는 1897년 카탈루냐의 모더니즘 화가였던 라몬 까자스(Ramon Casas:1866-1932)와 미쿠엘 유틸리로 등과 같이 '엘스 콰트레 갓츠'를 오픈했다.

'엘스 콰트레 갓츠' 내부

카페를 들어서면 왼쪽 벽면에 큼지막한 그림이 시선을 잡는다.

19세기 말에 그린 라몬 까자스의 그림이다. 

라몬(앞)과 빼레(뒤) 두 사람이 열심히 2인승 자전거(tandem)를 타고 있는 모습인데 멀리 바르셀로나의 스카이라인도 그려 넣었다. 두 사람이 상체를 숙이고 열심히 페달을 밟는 모습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 그림은 카탈루냐의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자전거 타는 라몬(앞)과 빼레(뒤)' 그림이 카페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라몬은 1901년에는 이 그림의 뉴 버전도 그렸다.

20세기를 맞는 의미의 새 그림에는 자전거 대신 자동차를 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 불과 몇 년 사이지만 시대 변화를 보는 재미가 있다. 

두 그림은 지금도 카페의 벽면을 자랑스럽게 장식하고 있다. 

물론 원본은 바르셀로나 뮤지엄(Museu Nacional d'Art de Catalunya, Barcelona)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벽면에 전시된 뉴 버전

빼레와 카페를 연 동료들은 이곳을 카탈루냐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교류의 장으로 만들고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도록 음식 값을 안 받는다던지,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을 받는 등 너무 자유로운 운영을 한 덕(?)에 1903년 결국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프랑코 독재 정권하에서의 정치적 이유 등으로 문을 못 열다가 1989년에 다시 오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피카소는 이 카페와 어떤 인연으로 그의 생애 첫 전시회를 여기서 열게 되었는 지를 이야기하려면 그의 청년 시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도시 말라가(Malaga)는 피카소의 고향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으며 그가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온갖 미술 교육을 시켰으며 피카소가 13살 되던 해에 그의 그림을 보고 감탄한 아버지는 자신은 그림을 포기해야겠다고 말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는 그가 14세 때 그린 '페파 아줌마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스페인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로 뽑는 작품이다.

1896, Portrait of Aunt Pepa, Museo Picasso, Barcelona

그런가 하면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이 '삐(piz)'라고 하는 피카소 엄마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기서 '삐'는 스페인어로 '라삐(lápiz)'의 줄임말로 연필이란 뜻이다.

타고난 천재성에다 주어진 환경의 덕으로 그가 세계적 화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해에 여동생이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뜨자 그의 가족은 말라가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주하고 1905년 24세의 피카소가 파리로 떠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보낸 바르셀로나를 그는 진정한 고향이라고 말하곤 했다.

16세에 마드리드에 있는 최고의 예술학교(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에 들어갔으나 형식적인 수업이 싫다고 수업보다는 2년여를 프라도(Prado)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 고야,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습작하는데 몰두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가 말한 '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2년 후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피카소는 당시 예술 좀 한다는 이들의 사랑방이었던 '엘스 콰트레 갓츠'를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고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를 비롯 당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함께 이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1900년 19세였던 피카소는 드디어 이 카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게 된다.


'라삐'의 달인처럼 '엘스 콰트레 갓츠'에는 피카소가 남긴 연필 스케치가 여럿 있다.

결국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던 바르셀로나의 청년 화가는 이 카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바르셀로나 뒷골목의 조그만 카페를 세계적인 역사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카페의 벽면에는 그가 단골로 다니던 시절 카페의 메뉴 표지로 그려줬던 그림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벽면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는 카페의 메뉴커버로 사용한 피카소의 그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프랑스에서는 '벨레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라 부를 정도로 예술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스페인에서도 독립성이 강하고 독특하기로 유명한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카페가 아닌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논하고자 했던 이들의 앞선 생각이 결국 세계적 화가를 배출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 셈이다.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들의 후손들은 결국 이 유서 깊은 장소를 자랑스럽게 부활시켜 놓았다. 이 카페의 원조격인 '르 샤 누아'는 1897년 폐업한 후 지금은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 있는 것과 대조된다. 

 

바르셀로나 람블라 거리의 화려한 조명을 살짝 벗어나 100여 년 전 청년 피카소를 만났던 여행의 여운은 그의 전시회 포스터를 보고 다시 떠올릴 만큼 깊고 길게 남아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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