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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Aug 27. 2021

33. 오랜만에 뉴욕 , 그곳에는

메디치 전시회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진지 2년여 만에 다시 뉴욕 하늘 아래 섰다.

모든 게 조심스러운 여정이었지만 뉴욕은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변함없이 웅장한 모습으로 반겨주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하 메트) 앞에 서니 코로나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장 인원을 시간대별로 제한하고 있어 미리 예약을 하고 왔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입장객들이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으나 간혹 코스크를 하고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들의 모습도 보여 입장을 기다리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메트 입구에 커다랗게 걸린 현수막에는 어디서 본 듯한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초상화 전(21년 6월 26일~21년 10월 11일)이란 글귀가 쓰여있다.

"The Medici".

내가 오늘 메트를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다.


늘 인파로 북적이던 입구의 안내 데스크에는 안내원이 한 사람도 없다. 비대면 서비스(?)다.

그리고 입장료를 헌금 형식으로 자율적으로 받던 시스템 대신 뉴욕 시민이 아니면 25불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뉴요커들은 무료입장이지만 어려운 시기에 박물관 운영의 어려움에 동감하는 많은 뉴요커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한다며 같이 간 친지도 서슴없이 25불을 지불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좋다.


메트 티켓 판매소


오랜만에 찾은 메트라 다시 보고 싶은 작품들도 많았지만 우선 메디치 특별 전시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메트가 넓다고는 하나 2층에 있는 전시장으로 가는 동안 마주치는 이들도 거의 없고 지나는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1층 카페 앞 회랑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코로나 비상시국이 아니라면 메트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일 것이다.

텅 빈 1층 회랑

이번 메디치 전시회는 메디치 명성만큼 크고 화려한 전시회는 아니었다.

1512년부터 1570년까지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보이는 작품 90여 점을 전시한 특별 전시회다.

그런데 왜 하필 1512년에서 1570년까지 일까? 이 시기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제2의 전성기였다는 설명이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2층 999호실 입구에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과 제2 전성기를 이끈 주역 코시모 1세의 흉상이 입장하는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메디치 전시장 입구



제2의 전성기라~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500-1571)가 제작한 코시모 1세의 흉상을 감상하며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던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잠시 생각해 본다.


'Bust of Cosimo 1',1543, Cellini, Palazzo del Popolo, Florence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에 우뚝 선 메디치 가문은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이 이 기간 동안 흔들림 없이 피렌체의 막강한 가문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메디치 가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1434년 피렌체 공국의 실권자가 된 이래 그의 손자 피에로 2세(르네상스의 주역 '위대한 로렌초'의 장남)의 실정으로 수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1498:이탈리아 판 분서갱유 사건 '허영의 소각:Bonfire of Vanities'을 일으킨 장본인:https://brunch.co.kr/@cielbleu/144 참조)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1494년 공화정 체제로 들어간 피렌체에서 쫓겨난다.

그 후 18년을 방랑하다 공화정 정치에 식상한 피렌체의 요구로 1512년 피렌체로 다시 입성하게 된다.

다음 해인 1513년 메디치가의 레오 10세('위대한 로렌초'의 차남)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그 후 장자 상속 룰을 따라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은 1527년 메디치가 배출한 두 번째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의 불편한 관계로 다시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3년 뒤인 1530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로렌초 2세의 사생아로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는 이복 남매다)가 피렌체의 통치권자로 복귀하지만 그는 무능력한 데다 폭정만 일삼다가 결국은 사촌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의 후임으로 먼 친척인 코시모 1세가 1537년 정권을 이어받게 된다.

그는 취임 후 153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조카인 스페인의 엘리노어(Eleanor of Toledo)와 결혼하여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정적을 과감히 처단하는 등 강력한 독재 정치를 하는 반면 탁월한 외교와 문화 부흥 정책 등을 추진하여 메디치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코시모 1세 기마상

피렌체의 중심가에는 우피치 박물관과 베키오 궁이 있는 시뇨리아 광장이 있다.

너무 많은 예술 작품들이 별스럽지(?) 않게 전시되어 있는 광장 중앙에 우뚝 선 기마상의 주인공이 바로 코시모 1세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베키오 다리 위를 점령하고 있던 정육점을 모두 현재와 같은 보석가게들로 바꾸고 부인 엘레노어와 함께 피티 궁을 메디치가의 궁으로 완성했으며 시에나 공국을 점령해 영토 확장에도 기여했다.

1560년대 종교 개혁 등으로 유럽의 국가들이 혼란스러울 때 1569년 토스카나 대 공국을 선언하여 자신의 지위 또한 공작에서 대공으로 승격시킨 인물이다.


이번 전시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1512년부터 코시모 1세 재임 기간 동안인 1570년까지 격랑의 시기를 조명한 점이 흥미로왔다.




전시장은 메디치가의 가계도로 시작되었다.

첫 전시실에는 메디치 가문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는데 여러 명의 관람객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가계도를 보고 있다. 가계도를 보다 보면 코시모, 로렌초, 피에로, 쥴리아노 등 동명이인이 많아 헷갈리기 안성맞춤이다.

제1 전시실

그 옆으로 1512년 피렌체 귀환 후 첫 통치권자였던 쥴리아노의 초상화가 있다.

그는 다빈치와 라파엘을 적극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한데 초상화 속 쥴리아노의 뒷 배경이 심상치 않다. 뒷 배경으로 그려진 곳은 로마의 산탄젤로 성인데 실제로 그림이 그려진 몇 년 뒤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로마의 약탈(1527년)' 사건으로 바로 이곳에 7개월여를 갇히는 대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그려진 초상화가 심상치 않다.

바로 옆에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아버지인 로렌초 2세의 초상화가 있다. 로렌초 2세는 딸의 명성에는 못 미치는 무능하고 오만한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두 작품 다 라파엘의 작품이다.

쥴리아노(좌),라파엘,1515,Met / 로렌초 2세(우), 라파엘,1518,개인소장
알레산드로 메디치, 1534, Jacopo da Pontormo, 필라델피아 뮤지엄(좌), 클레멘스 7세,1525, Sebastiano del Piombo, 카포디몬테 뮤지엄(우)

로렌초 2세의 뒤를 이은 알레산드로 2세의 초상화는 재미있게도 그가 여인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초상화는 주인공이 책을 들고 있거나 귀중품을 가지고 있거나 장갑(높은 신분을 의미한다고 함)을 들고 있는 모습 등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통치자의 초상화라니. 더구나 그는 유명한 난봉꾼이었다고 한다. 결국 알레산드로는 부적절한 행실로 사촌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그야말로 모델이 누군가를 나타내 주는 초상화의 진 면목을 보여 준다고 할까? 설명을 보면서 혼자 웃었던 그림이다. 그 옆으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모두 1512년 메디치가 피렌체로 돌아온 이후 1537년 까지 피렌체를 좌지우지했던 인물들이다.


'코시모 1세 전시실'에는 당시 피렌체의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 브론치노(Bronzino:1503-1572)가 그린 갑옷으로 무장한 그의 초상화와 부인 엘리노어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갑옷 입은 코시모 1세, 1545, Bronzino, 뉴사우스웨일즈 갤러리,시드니(좌), 엘리노어와 그의 아들,1550,Bronzino,피사 국립 왕궁 미술관(우)


브론치노가 엘리노어의 초상화를 여러 편 그려서인지 그림 속의 그녀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엘리노어와 그림 속 그녀의 첫 번째 아들은 피사를 여행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젊은 나이인 40세(1562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피렌체의 피티 궁(Palazzo Pitti)은 그녀가 1549년 피렌체의 은행가에게서 구입하여 메디치 가문의 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시모 1세 전시실


코시모 1세는 아카데미(Accademia Fiorentina)를 설립하여 중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 시인 단테(Dante Alighieri:1265-1321)와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1304-1374)의 시를 논하곤 했는데  당시 그려진 초상화들은 이들의 시집을 들고 있는 모습의 주인공을 그리는 것이 대 유행이었다고 한다.

'미술사 열전: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으로 유명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의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6인의 시인들'이란 그림도 전시되어 있어 이런 주장을 증명해 주는 듯 하다.  

Six Tuscan Poets,1544, Giorgio Vasari, 미네아폴리스 인스티튜트

바사리 작품 속의 인물들은 왼쪽부터 메디치 가문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1443-1499), '위대한 로렌초'의 개인 교사였던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ristoforo Landino:1424-1498),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1304-1374), 페트라르카의 절친이자 '데카메론'의 저자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1375), '신곡'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1265-1321), 그리고 단테의 친구이자 지적 동반자인 귀도 카발카티(Guido Cavalcanti:1255-1300)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나니 그림의 무게가 확 느껴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브론치노 역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는 설명이다. 그와 연관된 흥미 있는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단테에게 연인 베아트리체, 페트라르카에게는 연인 라우라(Laura de Noves)가 있었다면 브론치노에게는 바로 이 여인 '라우라 바티페리'가 있었다고 한다.

Laura Battiferri의 초상, 1560, Bronzino, 베키오궁 뮤지엄

브론치노와 유부녀인 라우라는 플라토닉(?) 사랑을 나눈 사이로 알려져 있다.

브론치노는 그녀를 베아트리체나 페트라르카의 라우라 보다 한 수 위의 여인이라고 말하곤 했단다.

그녀의 첫 시집은 엘리노어에게 헌시되었으며 그림 속에 그녀가 보고 있는 책은 페트라트카가 그의 라우라를 찬미하는 시집(Petrarchan sonnet)이라고 한다.  역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피렌체를 대표하던 매너리즘(mannerism)의 대가 브론치노(Bronzino:1503-1572)와 살비아티(Francesco Salviati:1510-1563)의 작품을 비교해 놓은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두 대가의 작품을 비교 감상하는 좋은 기회였다.

당대의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브론치노는 피렌체에서, 살비아티는 로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매너리즘 화가지만 두 사람의 화풍은 각각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브론치노의 작품은 많은 작품들 사이에서도 그의 작품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창백하리 만큼 단아한 대리석 느낌의 피부톤이라든가 기교로 단련된 자연스러움은 그 만의 독특한 기법이다.

반면 살비아티는 베네치아파들이 보여주는 생기 있는 색감과 풍요로움으로 브론치노의 작품과 차별이 되곤 한다. 바사리도 살비아티의 기법을 아름답다고 극찬했다는데 보는 이의 관점이 중요 할거 같다.


여러 작품 중 브론치노의 '루도비코 카포니의 초상'과 살비아티의 '남자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았다.

'Ludovico Capponi',1543-48,Bronzino,Frick Collection(좌), 'Portrait of a Man',1544,Salviati,St.Louis


브론치노의 '루도비코 카포니의 초상'은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에서도 보았던 작품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림에 얽힌 프릭의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어린 미소년 루도비코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만 코시모 1세가 두 사람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엔 그랬다고. 그런데 엘리노어가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해 주자고 하자 코시모는 그럼 24시간 내에 결혼을 할 수 있다면 허락하겠다고 했단다. 그림 속의 루도비코는 그의 오른손에 '운명'이라고 새겨진 장식품을 쥐고 있는데 이것은 루도비코가 그녀와의 결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그 여인과 결혼했다.


살비아티의 작품은 대리석의 창백하리 만큼 차가운 브론치노의 얼굴보다는 좀 더 화색이 도는 생기 있는 색감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왼손에 장갑을 들고 있어 신분이 높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배경의 묶은 커튼은 사랑의 결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살비아티는 그림 왼편에는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을 의미하는 신의 모습을 그려 넣어 피렌체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뽑힌 작품이 궁금했다.

주인공의 마스크 같이 깨끗한 얼굴은 브론치노의 작품임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고 양옆에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조각상을 비교해 보는 것이 감상 포인트라는 설명이다. 역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책을 든 젊은 이의 초상', mid 1530, Bronzino, Met


오랜만의 눈 호강이었다.

인원 제한 덕에 관람을 하기에는 오히려 쾌적함까지 들었다. 좋아하는 그리고 보고 싶은 그림들을 찾아 넓은 전시실을 오랜만에 원 없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중간중간 놓인 벤치마다 '앉지 마시오'라는 사인을 보며 여느 때와는 다른 상황임을 문뜩문뜩 실감하게 된다.

2층 전시실: 19-20세기 유로피안 페인팅(세잔)
2층 전시실: 19-20세기 유로피안 페인팅(피카소, 클림트)
1층 Robert Lehman Colletion 앞 회랑(고갱, 반돈겐)



Roof Garden에 오르니 쎄사미 스트릿(Sesame Street)의 주인공 빅버드 조형물이 반겨 준다.

Alex Da Corte라는 젊은 조형작가의 작품으로 제목은 'As long as the sun lasts'다. 10월 31일까지 전시한다.

여러 가지로 답답한 현실에 멀리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 위로 그네를 타고 있는 빅버드의 모습이 생뚱맞으면서도 계속 눈길을 잡는다. 다리도 쉬어 갈 겸 허락된 의자에 앉아 오가는 이들의 마스크 쓴 모습을 보면서 이것 또한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야외지만 여기서도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As long as the sun lasts', Alex Da Corte, Roof Garden


실내 카페는 모두 문을 닫았고 운동장 같이 크다고 느꼈던 커다란 엘리베이터도 4명 제한이다.

많은 여건이 달라진 메트지만 거기서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명작들을 생각하며 다시 자유롭게 메트를 방문하게 될 날을 고대하며 발길을 돌렸다.

메트 입구의 무인 안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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