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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un 03. 2019

12. 피렌체,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시뇨리아 광장의 청동 표지>

피렌체의 중심부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의 수많은 인파들이 우피치와 베키오 궁 등 끝없이 펼쳐지는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정신없이 감상하는 동안 광장 중앙의 바닥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속 표시를 눈여겨보는 이는 별로 없다.

수많은 볼거리로 피렌체에서는 시선을 아래로 둘 여유가 없다. 넘쳐 나는 걸작들 속에서 굳이 허리까지 굽혀 땅을 볼 이유도 없다.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 광장
관광객이 무심히 밟고 있는 시뇨리아 광장의 청동 표지


피렌체에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걸작 수태고지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산 마르코 수도원(Basillica San Marco)도 있다. 이곳에는 수태고지만큼이나 유명한 방이 있는데 15세기 산 마르코의 수도원장을 지낸 이방이다.

산 마르코 성당 안의 고요한 정원
산 마르코 수도원의 벽에 그려진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 수태고지
산 마르코 수도원장이었던 사보나롤라의 검소한 방

시뇨리아 광장 바닥과 산 마르코 수도원 등 이런저런 이유로 피렌체 여기저기에 족적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Reformation,1517년)보다 30여 년이나 빨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149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북부 이탈리아 페라라 출신인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 도미니크 회의 수도사이자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마틴 루터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보나롤라의 초상화, 1498, 프라 바르톨로메오, 산 마르코 박물관
로렌조의 사후 초상화, 1533, 조르조 바사리, 우피치

사보나롤라는 로렌조 메디치(Lorenzo de' Medici:1449-1492)의 화려한 정책 하에 문화의 부흥기를 맞아 르네상스라는 문화의 풍요를 탐닉하던 피렌체인들에게 오히려 경건한 금욕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문화의 풍요 속에서도 금욕생활을 강조하는 그의 설교는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피렌체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 중에는 그의 설교를 통해 천국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한 이들도 있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사보나롤라가 8년 동안 피렌체의 성당에서 설교하는 동안 많은 군중들은 그의 불같은 메시지를 듣기 위해 한밤 중에도 몰려들어 성당 열리기를 기다릴 정도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K-pop 공연장을 둘러싼 팬들의 긴 줄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회악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고 향락에 들떠 부패한 삶을 사는 지도자에 대한 질타를 서슴지 않는 그의 설교를 당시 유력한 지도자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다. 

그 정점에는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조가 있었으니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데려오는 데 일조를 했던 그의 심기가 어땠을지는 상상이 된다.


그러던 중 사보나롤라의 예언대로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해 오자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가 부패한 피렌체를 정화시킬 인물이라 여기고 그를 설득하여 2번이나 순순히 퇴각시켰다고 한다. 그의 이런 행동을 본 피렌체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피렌체의 새 통치자로 뽑게 되고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거룩한 도시로 만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497년 ‘허영의 화형식(Bonfire of the Vanities)을 시뇨리아 광장에서 행했다. 마치 중국의 진시황의 분서갱유처럼 말이다.


이때 세속적이고 사악한 책들, 음란서적과 그림들은 물론 당시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가발까지 불에 태웠다고 한다. 유명한 보티첼리도 사보나롤라의 연설에 매료되어 자신의 작품들을 태우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였던 보티첼리의 그림에는 그를 주제로 한 듯한 작품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펠레스의 비방(Calumny of Apelles)'이다.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구전되어 오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화가 아펠레스의 그림을 재현한 것인데 작품의 내용을 보면 가운데 무죄(Innocence)가 중상모략하고 질투하는 자들에 의해 머리채가 잡힌 채로 억울함을 당하고 있으나 진실(왼쪽의 나신)이 밝혀질 것임을 암시하는 그림이다. 머리채를 잡힌 채 고난을 당하는 이는 보티첼리 자신일 수도, 사보나롤라일 수도 있다는 미술평론가들의 해석이 있는 대표 작품이다.


아펠레스의 비방, 1494, 보티첼리, 우피치

그런가 하면 런던의 내쇼날 갤러리에는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동한 보티첼리가 그의 설교 내용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는  '신비한 탄생(The Mystical nativity)'이 소장되어 있다.

The Mystical nativity,1500, 보티첼리, 런던 내쇼날 갤러리


그러나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반대하이들은 있기 마련. 그의 정치 신념을 반대하는 이들이 교황에게 사보나롤라를 중상모략하기 시작했다. 마침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사생활이 문란하여 여러 명의 사생아가 있다는 루머가 있었던 교황으로 교황의 사생활을 격렬히 비판하는 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교황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보나롤라에게 교황은 뇌물과 추기경 직위를 제안하며 그를 매수하려 했으나 거기에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결국 로마교회는 그를 이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1498년 5월 23일 시뇨리아 광장, 현재의 청동 표지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의 화형식, 1650, 작자미상, 산마르코 박물관

로렌조의 죽음 이후 그의 맏아들인 피에로(Piero di medici)의 실정과 사보나롤라의 광풍 속에 피렌체는 혼란의 시기를 갖게 되었다. 1512년, 로렌조의 둘째 아들이 교황 레오 10세가 되면서 피렌체는 다시 메디치가의 집권 하에 놓이게 된다.


르네상스의 꽃, 피렌체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광장 바닥에 홀연히 남은 사보나롤라의 동판은 알아서 찾아온 이들에게는 많은 생각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도로 장식의 일부로 보이는 극과 극의 양면을 보이는 피렌체의 유물이었다.


시뇨리아 광장의 사보나롤라 화형장이었음을 알리는 청동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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