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피카소의 작품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여인의 초상화가 있다.
피카소까지 연결이 안 되더라도 낯익은 초상화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우디 알렌의 2011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요 장면의 배경에 걸려 있던 작품이라 서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 속의 여인이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는 대상을 조금은 미화하는 형태로 그려진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는 기존의 초상화와는 사뭇 달라 처음 이 초상화를 본 이들은 아마도 주인공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이 초상화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결국 이 초상화는 주인공의 거실 중앙 벽에 걸리는 영광을 얻었고 그녀를 대표하는 그림이 되었다.
거트루드 스타인, 1906, 피카소,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뉴욕
뉴욕에는 이 여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뉴욕의 중심가인 5번가를 남쪽으로 걷다 보면 두 마리의 대리석 사자상이 근엄하게 건물 앞을 지키고 있는 멋진 건물을 보게 된다.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이다.
뉴욕 공립 도서관
이 건물이 1911년 대중에게 오픈되면서부터 건물 앞을 지키고 있는 이 사자상은 각각 'Patience(인내)'와 'Fortitude(꿋꿋함)'라는 닉네임으로 뉴요커들의 사랑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타는 사자상이다.
'Patience'(좌)와 'Fortitude'(우)
사자상의 닉네임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때 뉴욕 시장이 시민들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데 현재까지도 뉴요커들의 사랑을 받으며 변함없이 불리고 있다.
이 유명한 사자상은 뉴욕 공립 도서관의 로고(logo)로도 쓰이고 있다.
열람실 컴퓨터를 장식하고 있는 사자상 로고
공립 도서관이라고 하기에는 명소들이 너무 많아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가이드 투어를 하는 것이 좋을 정도다.
공립 도서관에 가이드 투어라니 그 규모가 짐작이 될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장소가 이 건물 3층에 있다.
'Rose Main Reading Room'으로 부르는 열람실인데 방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진다.
길이가 축구장 길이만 하다나?
그런데 이런 시설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니 더 할 말이 없다.
'Rose Main Reading Room'
규모만 큰 게 아니라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도 방대하다.
뉴욕 공립 도서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10,000여 장이 넘는 지도(map)를 소장하고 있는 열람실이 있는데 그곳에선 독도에 관한 반가운 자료도 볼 수 있다.
역시 세계 최고 인정이다.
1층 'Maps & Atlases'룸에 있는 독도 관련 자료
세계 최고의 도시중 한 곳으로 뽑히는 뉴욕.
그곳의 공공 도서관은 매년 전 세계에서 오는 100만이 넘는 방문객을 맞이하며 도시의 명성에 걸맞은 위용으로 대중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그 건물 뒤에는 뉴욕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공원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가 있다.
계절에 따라 여러 행사가 열리는 이곳은 여름엔 음악회, 겨울엔 아이스 링크가 개설돼 많은 뉴요커들의 사랑을 받는 아담한 공원이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여름과 겨울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사설이 길었다.
드디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다.
공원으로 들어서면 피카소의 그림과 비슷한 포즈의 여인의 좌상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녀의 명성이나 족적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한 모습으로 공원 한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아방가르드의 거장,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입구에 자리한 거트루드 동상
거트루드 스타인
(Gertrude Stein:1874~1946)
피카소도 헤밍웨이도 꼼짝 못 한 파리 예술계의 대모였던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은 몰라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가 시간 여행을 하던 젊은 작가 지망생에게 그가 쓴 소설을 평가해 줄 여인을 소개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중년의 듬직한 체구의 그 여인이 바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거트루드 동상, 1923년 Jo Davidson작품, 1991년 청동 주조, 1992년 뉴욕시에 기증됨.
그녀는 1900년대 초 파리의 벨레포크 시대의 중심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던 여인이다.
실제 기록에 남아 있는 그녀의 거실 사진은 우디 알렌의 영화 속에서 그녀의 살롱 벽을 신인 작가(?) 피카소의 작품들로 장식한 것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1910년 경의 스타인 살롱 내부
그녀는 미국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래드 클리프와 존스 홉킨스 의대에서 수학한 수재다.
의대 수업이 자신과는 맞지 않음을 깨달은 그녀는 과감히 학업을 중단하고 1903년 오빠들과 파리로 이주한다.
거트루드와 두 오빠, 리오(좌)와 마이클(우),1906년
그녀는 미술품 수집가로서 유능한 예술가를 많이 발굴해 냈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 근처 ‘플뢰르 27번가 (Rue de Fleurus)’에 살면서 매주 토요일 저녁 ‘스타인 살롱(Stein Salon)’을 열었다.
봄날의 뤽상부르 공원
스타인 살롱이 있던 건물
그 당시 이 살롱에 출입한다는 것은 곧 예술가로서 출세를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녀의 살롱이 있던 건물에는 그녀가 '미국 작가'로 표기되어 있고 그녀의 오빠 리오(Leo)와 그녀의 평생 파트너였던 앨리스가 같이 살았던 곳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스타인 집 앞의 현판
그녀는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의 비평가나 멘토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명성 뒤에는 두 오빠들의 재정 지원과 예술 작품을 선별하는 안목 등이 큰 몫을 했다.
스타인 살롱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살롱 벽에는 그 당시에는 신인 작가였지만 지금은 거장이 된 예술가들의 작품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고 한다.
피카소, 마티스, 들라크루아, 고갱, 볼라르, 세잔, 르누아르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니, 탁월한 안목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토요일 저녁, 살롱을 찾는 단골손님들의 이름을 읽다 보면 어지러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들이다.
헤밍웨이, '위대한 개츠비'의 스캇 피츠제랄드, '미라보 다리'의 기욤 아폴리네르, 그의 연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 피카소, 화가이자 피카소의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화가 조지 브라크, 앙드레 드랭, 앙리 루소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주인공이 그의 글에 대한 그녀의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인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을 그녀에게 소개한 사람이 헤밍웨이라니. 대단한 설정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주인공의 소설을 검토한 그녀는 어떤 평을 해 주었을까?
거트루드는 주인공이 쓴 소설을 극찬했다.
‘이 시대에 볼 수 없는 작품’이라면서.
21세기에 쓴 소설이니 그녀의 평은 정확했다.
한편, 작가였던 거트루드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서 이 표현을 사용해 유명해졌지만 원래 거트루드가 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세대를 총칭하는 뜻으로 사용한 말이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그녀를 멘토로 여기며 우정을 쌓았지만, 나중에는 작품에 대한 격한 토론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싸우며 정든 케이스라고나 할까?
대모(God Mother)가 되어준 헤밍웨이의 장남과 함께, 1924년
2차 대전 중에는 본인이 유대인이면서 나치에 협력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주장도 있고 그런 주장은 그녀를 향한 마녀사냥이라는 상반된 주장도 있다.
그녀는 전쟁 중 많은 부상 군인들을 돕는 자원봉사를 한 반면 많은 유대인들을 잡아들인 '베르나르 페이(Bernard Fay)'라는 인물과도 복잡한 관계였다고 한다.
페이는 거트루드의 글을 불어로 번역해 주면서 그녀와 친분을 쌓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쟁 후 종신형을 받은 페이를 감옥에서 탈출시키는데 거트루드(거트루드 사후에 그의 파트너인 앨리스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피카소 작품을 처분해 그의 탈출 비용을 마련했다고 함)의 재정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말이다.
이런 그녀의 불분명한 처신들이 불러온 그녀에 대한 상반된 주장들이다.
그녀는 자신이 자칭 타칭 천재라고 생각한 거 같지만 그녀의 작품은 천재의 작품 치고는 인기가 없었다. 원래 천재의 작품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감흥을 주기가 어렵긴 하다. 그녀의 작품 가운데 그녀의 평생 동반자 앨리스 토클라스의 전기를 쓴 한 권만이 20세기 현대 문학 20선에 선정되었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앨리스 토클라스(Alice B. Toklas:1877-1967)와 1907년 파리에서 만난 후 평생을 동반자로 살았다.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에서 거트루드와 앨리스
앨리스는 늘 거트루드를 그림자처럼 보필했으며 두 사람은 파리의 스타인 살롱을 같이 운영했다.
예술에 대한 많은 의견을 나누며 스타인 가족의 소장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거트루드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진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사후 스타인 가족은 거트루드가 유언으로 남긴 상당한 유산을 앨리스에게 주지 않았다. 법적으로 두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는 이유로.
결국 앨리스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요리책을 내기도 하였으나 가난 속에서 여생을 힘들게 살다 갔다는 씁쓸한 이야기다.
파리 페르 라세즈의 거트루드 묘비
거트루드는 1946년, 72세에 파리 근교 누이 시(Neuilly-sur-Seine)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는데 묘지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Père Lachaise Cemetery-Division.94)에 있다.
그녀의 39년 파트너였던 앨리스도 그녀 곁에 묻혔다.
다행인지 거트루드의 묘비 바로 뒷면에는 앨리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거트루드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 그녀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과 현대 문학에 직간접으로 끼친 영향은 당시를 살았던 탤런트 있는 예술인들을 찾아내고 지원하는 대모 역할을 한 것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뛰어난 안목이 없었다면 많은 천재 예술인들이 빛을 못 보았을 수도 있고, 천재성을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82번가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시작한 거트루드의 여정은 42번가의 브라이언트 파크에 와서 끝났다.
예술이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이 나올 수 있다. 그 평이 나의 느낌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거트루드의 안목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좀 더 나은 안목을 가져보고자 부지런히 뮤지엄 문턱을 넘고 있다. 옳고 그름이 아닌 다른 시각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바로 옆에는 유명 베이커리 '레이디엠(LadyM)'이 있다.
향긋한 커피 한잔과 그곳의 시그네쳐 케이크(Mille Crepes)를 앞에 놓으니 피곤한 몸이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