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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Nov 20. 2021

35. 운 좋게 이건희 컬렉션에서

     피렌체 베키오궁 까지



운 좋게 관람이 쉽지 않다는 이건희 컬렉션의 취소분이 내 차지가 되었다.

날 좋은 가을날 설레는 마음으로 국립현대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에 도착하자 곧장 책방으로 가서 컬렉션 도록을 사들고 좋은 향을 따라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입장을 기다렸다. 도록을 넘기며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름들을 보다 보니 전시장 관람이 더욱 설레어진다.

입장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입장객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고 일일이 신분 확인을 거쳐 입장을 하게 되었다. 전시 관람을 위한 입장 절차 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입장을 하고 나니 감회가 새롭다.

전시관 내부(왼쪽 두 번째 작품은 김기창 화백의 부인 박래현 작가의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귀한 작품들에 일일이 눈길을 주며 하나라도 놓칠세라 찬찬이 감상해 가는데 자꾸만 시선은 건너편 전시실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작품으로 향한다.

군마도, 1955, 김기창(오른편 두 작품은 권진규 작가의 작품이다)

전시실 전면에 전시된 김기창 화백의 군마도다.

여섯 마리 말의 역동적인 모습이 당장이라도 화면을 박차고 뛰어나올 것 같은 이 대작은 운보 김기창 (1913-2001) 화백의 1955년 작품으로 그의 여러 편의 군마도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뽑힌다고 한다.

도록에는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전후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했던 작가의 심정이 표현된 듯하다는 설명이 따른다.  

거장의 거작(가로 X 세로:217X492cm) 앞에 서니 그림의 강렬함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으면서 그림 속 말들의 힘찬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말들의 역동적인 모습에 시선을 묶인 채 감상하다 보니 생각나는 작품이 하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다.

다빈치의 그림에서는 말들보다는 싸우는 인물들이 더 강조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으니..



피렌체의 베키오궁에는 '16세기 홀(Salone dei Cinquecento)'이라 불리는 대의회실이 있다.

16세기 당시 르네상스를 이끌던 메디치 가문이 무능한 정치로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https://brunch.co.kr/@cielbleu/256 참조) 피렌체에는 공화정 정부가 들어섰다.

공화정 정부의 초대 지도자였던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는 이 방을 만든 주인공이다. 1495년의 일이다.

그러나 1498년 교황의 파문을 받은 사보나롤라는 이단으로 화형(https://brunch.co.kr/@cielbleu/144 참조)에 처해지고 그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된 피에르 소데리니(Pier Soderini)가 '16세기 홀'의 재단장을 추진하면서 당대를 대표하던 두 거장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그 일을 의뢰하게 된다.


두 거장은 피렌체의 승리를 담은 전투 장면이 담긴 대형 프레스코화로 대의회장의 벽면을 장식하기로 하면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프로젝트에서 머리를 맞대게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 베키오궁 대의회실

1503년 먼저 의뢰를 받은 것은 미켈란젤로였다.

피에르 소데리니는 미켈란젤로에게 1364년 피렌체가 피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카시나(Casina) 전투'를 의뢰했다.

그림의 내용은 전투 경보가 울리자 군인들은 목욕하던 강에서 황급히 뛰어나와 전투 준비에 임하는 민첩한 행동을 보이는 장면으로 용병들의 용감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미켈란젤로 작품임을 쉽게 알 수 있게 옷을 벗고 있는 근육질의 남성들로 용병들이 그려져 있다.

당시 세력의 중심에 있던 이들에게는 공연히 시민들을 부추겨 시민군을 만들었다가 행여나 실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통치권자인 소데리니는 피렌체의 방어를 위해서는 아마추어 시민군보다는 전문 용병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그림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떠나게 되어 밑그림만 그려 놓은 채 벽화는 미완성으로 남았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는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보고 1542년 상갈로(Bastiano da Sangallo)가 완성시킨 것이다.  

'카시나 전투', 1542, Bastiano da Sangallo, Holkham Hall, UK

우리에게는 군주론의 저자로 유명한 마키아벨리(1469-1527)가 당시 공화정의 서기장으로 있었다.

그는 1504년 다빈치에게 1440년 피렌체가 밀라노 공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앙기아리(Anghiari) 전투'의 벽화를 그려 줄 것을 주문했다.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말들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격렬한 전투 중임에도 말 위에서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은 기이한 표정과 액션을 취하고 있는 용병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는 전사자가 단 한 명으로, 그마저도 자신의 말에서 낙마해서 사망했다는 희한한 기록이 있어 굳이 용병의 도움 없이도 피렌체를 지켜 낼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용병 무용론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앙기아리 전투', 1603, 피터 폴 루벤스, 루브르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1506년 밀라노로 떠나게 되었다. (의뢰받은 작품(암굴의 성모)의 미완성 때문에 소환된 것이라 한다)

그의 원작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벽화 작업을 위해 습작했던 드로잉만 남아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밑그림을 본 후배 화가들이 그린 모사본만이 남아 있다.

'앙기아리 전투'하면 검색되는 그림은 1603년 피터 폴 루벤스의 모작이다.

비록 1506년 중단된 미완성 작품이지만 미술사가들은 다빈치의 최고 역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현재도 '앙기아리 전투' 원본이 어딘가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들을 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마르시아노 전투', 1570, 조르지오 바사리, 베키오궁


현재 '앙기아리 전투'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벽면에는 16세기 건축가이자 화가인 조르지오 바사리가 1563년 당시 권력을 장악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https://brunch.co.kr/@cielbleu/256 참조)의 주문으로 메디치가의 승리를 기념하는 새 벽화 '마르시아노(Marsiano) 전투'가 그려져 있다.

'마르시아노 전투'는 1554년 시에나와의 전투에서 피렌체에게 승리를 안겨준 전투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중앙 상단 진격하는 군인들 사이에 휘날리는 깃발에 쓰여 있는 간단한 문구 하나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르시아노 전투' 그림 중앙에 노란 표시에 'CERCA TROVA'라고 쓰여 있다.
'마르시아노 전투' 일부 확대 사진

'CERCA TROVA'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는 뜻의 의미 심장한 문구다.

모 TV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방영되었다는데 많은 이들은 다빈치를 추앙하던 바사리가 그의 그림 위에 자신의 그림을 과연 덮어 그렸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추측이다.

지난 40년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원본의 행방을 조사하던 UC San Diego의 세라치니(Maurizio Seracini) 교수가 벽화에 적힌 'CERCA TROVA'가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의 위치를 알려 준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인데(실제로 그는 다빈치 만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고유의 물감 성분을 바사리의 벽화 뒤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찬반 의견이 아직도 분분한 상태다.



잠시 먼 나라까지 날아간 생각의 나래를 다시 잡아들이고 나니 여전히 여섯 마리의 역동적인 말들은 순수하고 건강한 자태를 내 앞에서 뽐내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청각을 잃은 장애를 넘어 다시 재 도전하는 열망으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군마도를 탄생시킨 작가의 열정이 느껴지는 듯하여 자리를 뜨기가 어렵다.

복잡한 다른 의미 없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진 김기창 화백의 군마도.

그의 작품이 존경받는 이유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의 마음을 읽어 내는 관람자의 '체르카 트로바'는 예술의 무한 세계를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예술 작품을 즐기는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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