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 문화에 녹아 있는 그리스의 영향은 폐일언하고라도 눈에 보이는 유적지는 과연 여기가 시실리인지 그리스인지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하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그리스 유적지로 손꼽히는 세 명소가 있으니 세제스타(Segesta), 셀리눈테(Selinunte), 아그리젠토(Agrigento)가 그곳이다.
현지인들이 시실리 방문 최적기로 꼽는 5-6월 과 9월(7,8월은 너무 덥다)엔 많은 관광객들로 유적지가 붐빈다고하나 겨울이 끝나갈 2월에 찾아간 시실리의 신전들은 거의 온전히 나의 독차지가 되었다. 조용히 유적지를 감상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황금 같은 기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비수기의 단점도 있다. 가고 싶은 식당이나 가게, 호텔들이 많이 휴업 중이라 아쉬운 경우도 종종 생기니 말이다.
여행의 중점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따라 시실리의 여행시기는 결정되어야 할 것 같다.
인적이 거의 없는 신전이나 그리스 고대 극장들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어디 선가 고대인들이 신전을 향해 올라오거나 극장에 행렬을 지어 왁자지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묘한 감흥에 젖어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2000년 이상의 시간차를 넘어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되기도 하고.
그러나 거의 폐허가 되어 덩그러니 빈 공간을 품고 있는 신전과 그리스 극장의 돌계단 의자가 닳고 닳아 의자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가는 그리스 극장의 돌들을 바라보다 보면 서서히 멀어져 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한다.
세월에 장사 없다는 우리 옛말처럼 나 또한 언젠간 사라질 테고 지금부터 또 수백 년 세월이 흐른 뒤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나와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감상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폐허의 모습일지라도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2000년이 넘은 신전이 더 대단해 보인다.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앞에 꿋꿋이 또는 비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무너져 내린 돌들의 크기로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시실리 고대 그리스 유적지로의 여행을 떠나 본다.
산속의 외로운 신전, 세제스타
세제스타는 트로이의 아에네아스(Aeneas)가 트로이가 멸망하자 탈출하여 세운 도시라고 전해진다. 아에네아스는 트로이 왕족과 비너스 사이에 태어난 트로이 전쟁 영웅 중 한인물로 트로이가 그리스에 패할 것을 안 비너스가 아들 아에네아스에게 미리 알려줘 그를 피신케 했고 탈출 후 카르타고와 시실리를 거쳐 이탈리아로 와서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 속의 인물이다.
'트로이를 탈출하는 아에네아스', Federico Barocci,1598, 보르게제(Borghese), 로마
시실리의 첫 방문지 팔레르모를 출발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가는 길 내내 해안 길과 푸른 초원의 조화가 절묘하다)을 감상하며 40여분을 달리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산 자락에 빠꼼이 지붕을 보이고 있는 그리스 신전이 나타난다.
고속도로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세제스타의 그리스 신전
산중에 빠꼼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신전의 자태는 신비로움마저 들어 신전으로 가까이 가는 내내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한다. 시실리에 남은(무너진 신전 제외하고) 그리스 신전 중 규모가 가장 크다는 세제스타의 신전이다. 그리스인들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즐겼던 민족이라 많은 신전들이 주로 바닷가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지어졌는데 세제스타는 시실리의 내륙에 위치 한 곳이라 좀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것도 만만치 않은 크기의 신전을 산속에 지어놓았다니 말이다. 반대편 언덕 너머에는 그리스 극장( Teatro Greek) 유적까지 있다.
비수기라 좋은 점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있지만 가끔은 입장료도 안 받으니 전혀 불만은 없다. 그냥 들어가란다. 사람도 없고 마치 옛날 내가 지어 놓은 신전에 오랜만에 찾아온 느낌이라면 좀 과장이 심한 걸까?
신전 입구와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
세제스타 신전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인에 의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신전은 완성된 신전은 아니었을 것이라 한다. 그렇게 추측하는 몇 가지 특징을 보면 일반적으로 도리아식 기둥은 기둥에 홈을 만드는데 그런 흔적이 없으며(실제로 기둥은 밋밋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홈이 있는 도리아식 기둥
신전 안쪽에는 셀라(cellar)라고 하는 내부 공간이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런 흔적도 없고 무엇보다도 지붕을 얹지 않은 상태서 멈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5세기경 카르타고 인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미스터리 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신전이다. 이 신전은 누구를 위한 신전이었을까? 특정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모임 장소 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른 곳에서도 많이 봐서 눈에 익은 그리스 도리아식 신전을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섬의 내륙에서 만났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
아무튼 호젓하게 신전을 관람하고 반대편 그리스 극장을 가려는데 입구에 아저씨가 '걸으면 20분, 차 타면 5분' 한다. 요금은 왕복에 1유로 50.
신전에서 바라본 극장 올라가는 길이 하도 한심하여 망설임 없이 '씨(오케이)' 하고 차에 오른다.
신전에서 바라본 그리스 극장으로 올라가는 길
극장 표지판과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신전
꼬불 거리는 산 등성이 길을 따라 오른 뒤 그리스 극장 입구에 우리를 내려준 기사 아저씨는 30분 뒤에 데리러 다시 온단다. 그러나 시실리 인들의 시간 약속은 기약이 없다. 라틴족들의 느긋한 특징(?)이랄까? 그들의 시간 개념에 분통 터진 사람들 많다. 내려가는 길은 좀 낫겠지 싶어 안 와도 할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서니 또 아무도 없다.
세제스타 그리스 극장
수 천년의 세월을 품은 극장의 돌 좌석들
다시 온전히 내 것이 된 수 천년 전의 극장이다. 돌 좌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극장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이런 극장은 못 봤다'(며칠 뒤 나는 또다시 이런 극장은 못 봤다를 보게 되지만)였다.
어떻게 이런 장소를 골랐을까? 풍광이 너무 좋아 연극이 제대로 감상되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풍광이 좋아도 그렇지 이런 곳까지 고대 그리스 인들은 연극을 보러 치렁치렁한 그 당시 옷을 입고 올라왔을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염려는 잠시 접어 두고 이런 곳에서 연극 관람을 하며 살았을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무대 뒤쪽 산 위의 구름이 심상치 않다.
대체로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는 법이 없다.
예상은 적중하고 산 중턱에 걸린 검은 구름은 마치 이런 풍광을 그냥 보여줄 수 없다는 제우스의 심술같이 후드득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다행히 번개는 치지 않는다.
하산 길에 다시 보이는 세제스타 신전
세제스타에서 1유로 50의 위력은 대단했다.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우리를 데리러 차가 도착했으니 말이다. 어느덧 제법 굵은 빗방울을 뿌리던 검은 구름도 지나가고 다시 해가 나기 시작한다. 시실리의 겨울 날씨는 그야말로 변덕이다. 비가 온다고 낙담할 필요도, 해가 난다고 자만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늘이 주는 날씨에 수긍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자세인 듯싶다.
폼페이 벽화에 그려진 아에네아스와 디도
트로이를 탈출하여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과 사랑을 나누던 아에네아스가 제우스의 명을 받고 로마 건국을 위해 거쳐갔다는 시실리에 남긴 유적지, 세제스타.
한적한 산기슭의 그리스 신전과 극장은 서로를 의지 한 채 또 기약 없는 긴 세월을 버티어 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다음 목적지인 셀리눈테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