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el Bleu Mar 05. 2019

6. 신전의 계곡이라 불리는 유적지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이라 불리는 그리스 유적지, 아그리젠토


아그리젠토는 시실리를 여행하는 이들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장소 중 최대의 그리스 유적지다. 신전들이 모여 있는 지역의 이름마저 '신전의 계곡'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사실 이 곳은 계곡이라기보다는 바닷가 언덕이라는 게 더 어울리는 곳이다.

'신전의 계곡'이란 타이틀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신전이 총집결되어 있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유적지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시실리 관광의 최고 하이라이트라고 한다. 19세기 초에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보존 상태는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밤새 불을 밝히고 있는 신전의 계곡


늦은 밤 도착한 아그리젠토(Agrigento).

묶기로 한 비엔비의 정원에서 멀리 신전의 야경이 보인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도 조명이 비추고 있는 신전을 가리키며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저기가 거기다.'라면서. 내일 아침 일찍 찾아갈 곳이지만 이 밤 벌써 마음은 온통 신전 앞을 돌아다니고 있다. 저 멀리 신전의 야경은 아련히 보이고 묶는 방의 창 밖에는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금새 온 하늘을 덮어 버린다. 오랜만에 보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이다.

수 천 년 전 그리스인들도 보았을 그 별들이라 생각하니 시공간의 감각이 또 엉망이 된다. 나와는 무관 할 것 같은 시실리의 유적들을 보면서 갖게 되는 낯설지 않은 느낌은 이번 여행이 주는 독특한 감흥이다. 시실리에서는 이런 경험을 여러 차례 하게 되어 참으로 묘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이집트의 수 천년 된 피라미드를 보았을 때는 피라미드와 나는 확실하게 분리(전혀 다른 문화라는)가 되었었는데 여기선 온통 뒤죽박죽이다. 여러 문화가 섞여 있는 곳이 주는 묘한 마력 때문 일까?

이른 아침의 신전의 계곡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신전 쪽을 바라보니 여전히 조명을 밝히고 있는 신전의 계곡의 대표 신전 콩코르디아가 어서 오라고 부르고 있다.

비엔비 정원의 오렌지와 레몬 나무

그런데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정원의 과실나무가 이게 또 장관이다. 오래전 프로방스를 여행할 때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달린 체리를 보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시실리에는 그야말로 오렌지와 레몬 나무가 지천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여기선 오렌지나 레몬을 돈 주고 사 먹으면 무척 촌스러울 거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 같은 여행자는 물론 예외겠지만 말이다.

숙소의  탐스러운 정원풍경

그런가 하면 커다란 선인장과 오래된 올리브 나무 또한 빠질 수 없는 시실리의 전형적인 전원 풍경이다. 아침을 먹고 정원을 산책하다 보니 밤새 신전을 밝히던 조명은 꺼지고 저 멀리 지중해 바다의 아름다운 수평선이 보인다. 서둘러 신전의 계곡으로 출발이다.

우리를 부르는 콩코르디아 신전


아침 일찍 '신전의 계곡'을 찾아서인지 이 어마어마한 세계 유산은 또 나의 독무대다. 이젠 으레 혼자만 있는 것이 당연하게 까지 느껴진다. 시실리 최고의 유적지에서의 독무대라면 이런 특수 상황은 즐겨줘야 한다. 비도 오는 건지 마는 건지 맞고 걷기 좋을 만큼 뿌려 먼지 걱정까지 덜어 준다.

신전의 계곡으로 입장하는 길

우선 내가 제일 보고 싶었던 쌍둥이 신전(Temple of the Dioscuri:Castor and Pollux)부터 보러 간다. 입구에서 제일 가깝기도 하고 사진에서 본모습이 묘하게 느껴져 이 곳에 간다면 이 신전부터 보리라 다짐을 하고 찾아온 신전이다. 기둥 네 개가 부서지고 남은 지붕을 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수천 년의 희로애락을 전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여 가장 보고 싶었던 신전이었다. 그런데 설명에 의하면 19세기 초 개발 당시 주변의 잔해들을 맞춘 것인데 잘못 맞추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내가 신전 전문가도 아니고 지붕을 이고 있는 네 개의 기둥과 부분만 남은 파사드의 모습이 뭔가 어색했었나 보다.

이른 아침 신전의 모습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 적막하고 고독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쌍둥이 신전

신화 속의 쌍둥이는 제우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 사이에 나은 쌍둥이지만 아버지가 다른 쌍둥이다. 제우스는 이번에는 백조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레다를 유혹했다. 아버지가 다른 쌍둥이라니 신의 세계에서는 안되는 것이 없다.

'레다와 백조',1530, 미켈란젤로(복사본), National Gallery, London/로마에 있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동상

둘 중 폴룩스는 제우스의 자식이고 카스토르는 스파르타 왕의 자식이다. 레다는 트로이 전쟁의 화근이 된 헬레네의 어머니 이기도 한데 헬레네와 이들 쌍둥이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들의 세계는 인간사 보다 더 복잡하다. 맘에 안 들면 이리 틀고 저리 틀고 암튼 복잡하다. 제우스의 아들인 폴룩스는 불사의 몸이고 카스토르는 스파르타 왕의 아들이니 불사가 아니었다. 전쟁 중 카스토르가 죽자 폴룩스가 제우스에게 청을 하여 둘을 쌍둥이 별자리(Gemini)로 만들어 주었다고 신화는 전한다.

신전의 계곡을 대표하는 모습 중 하나인 쌍둥이 신전
쌍둥이 신전과 데메테르 신전터

쌍둥이 신전 옆에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제물을 올리던 제단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널려 있는 돌들의 잔해 속에서 관심을 가지고 찾지 않으면 그냥 돌덩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전 유적을 보는 사람들의 견해도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는 것 같다.


쌍둥이 신전을 지나면 바로 제우스의 신전터가 나온다. 제우스의 신전은 어딜 가도 대체로 완전 파괴된 모습이 많다. 그에 반해 헤라의 신전은 기둥 몇 개라도 서 있고 대충의 형곽이 남아있는데 말이다. 이곳도 예외는 아닌 듯 신전 터에 작은 동산을 이룰 정도의 돌무덤과 기둥 몇 개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리고 신전을 받들고 있던 거대한 조각상 텔라몬(Telamon)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리스 신화의 거인 족 이었던 아틀라스가 아닌가 생각할 수 도 있으나 그는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지구의 끝에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벌을 수행 중이니 말이다.

루브르 쉴리관의 카리아티드

텔라몬은 신전의 기둥 역할을 하는 거대한 남성상을 부르는건축용어란 설명이다.  반면에 기둥 역할을 하는 여신상은 카리아티드(Caryatide:https://brunch.co.kr/@cielbleu/46 참조)라고 한다. 텔라몬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영웅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옛날 커다란 신전을 지고 있는 8미터 가까운 거상들을 보면 경외심 같은 것이 마구 생겼을 것 같다. 지금도 그러니 말이다.

제우스 신전의 이모저모

제우스 신전을 지나면  지척에 헤라클레스 신전이 몇 개의 기둥만 서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준다. 제우스나 헤라 신전은 자주 보았지만 헤라클레스 신전은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이 드는데 상태는 다른 신전들과 오십 보 백보인 상태다. 그래도 제우스 신전보다는 기둥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겨본다. 전형적인 도리아식 기둥들이다. 세제스타 신전의 기둥에는 없던 홈이 새겨진 도리아식 기둥들이 남아있다.

헤라클레스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을 지나면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콩코르디아 신전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다. 밤새 불을 밝히며 그 자태를 뽐내던 바로 그 신전이다. 모습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거의 흡사하다. 낯설지가 않은 걸 보니 신전을 많이 보긴 했나 보다. 혹자는 신전이 뭐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그냥 보면 다 이 돌이 저돌이고 사방이 돌 천지니까. 사람도 각양각색이듯 여행의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도 다 다를 터. 그래서 항상 여행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의 모임이 호텔이나 식당 선택보다도 우선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콩코르디아 가는길에 핀 벚꽃들

콩코르디아 가는 길엔 벚꽃이 피어 눈을 호강시켜준다. 좀 이른 벚꽃 놀이를 이곳 시실리에서 미리 하게 될 줄이야.

드디어 콩코르디아 신전

드디어 시실리 하면 떠오르던 콩코르디아 신전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과 유사해 낯설지 않다고 했던가? 난 파르테논 신전 안 봤는데도 많이 본 신전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콩코르디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유네스코 로고로 쓰이고 있는 신전이라서 일 것이다.

유네스코 로고로 남은 콩코르디아

콩코르디아 신전은 마을 주민들의 모임 장소로 쓰였던 곳이라 한다. '하모니(조화)'를 주관하는 여신의 이름이라 한다.

그러니 파리의 콩코드 광장(https://brunch.co.kr/@cielbleu/26 참조)이 생각난다. '콩코드'. 단합이란 뜻이라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도 비슷한 단어를 만나게 되니 여행의 묘미가 다시 살아난다. 여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신전 앞에 땅으로 추락한 이카루스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아그리젠토 관광 사진에서 많이 보던 바로 그 조형물이다. 고대 그리스 유적지에 이런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2011년,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의 작품이다. 꽤 오랜 시간 조형물을 설치해 놓고 있는 것을 보면 반응이 괜찮은가 보다.

콩코르디아 신전과 이카루스 동상

그런데 왜 하필 추락한 이카루스 동상일까?

신화에 의하면 이카루스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다이달로스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크레타 섬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잠시 다이달로스 부자가 왜 크레타 섬에 감금되었는지를 이야기해 보자.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을 배신했던 미노스 왕에 대한 저주로 그만 황소에 욕정을 느끼는 저주에 걸렸다고 한다. 이런 왕비의 마음을 알게 되자 다이달로스가 멋진 암소 모형을 만들어 왕비의 욕정을 채우게 해 주었다. 그 결과 미노타우로스라는 반수반인의 괴물이 태어나고 이에 격분한 미노스 왕이 부자를 섬에 감금시켰던 것이다. 크레타섬을 탈출하기 위해 이카루스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신이난 나머지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그만 태양에 날개가 타서 추락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카루스 동상의 뒷 모습

그런데 다이달로스가 크레타 섬을 탈출해 정착한 곳이 시실리의 남동 해안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얼추 아그리젠토 지역과 비슷한 곳이다. 실제로  아그리젠토 근처의 젤라(Gela) 지역에 가면 다이달로스를 기리는 풍습도 남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신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다시 시실리 여행에서 유독 느껴지는 묘한 감흥이 몰려 온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길을 언덕 위의 헤라 신전으로 옮긴다.

멀리 헤라 신전이 보이는 고대 로마 시대 묘지

헤라 신전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고대 로마시대 묘지다.  저 구멍 하나하나에 시신을 모셔 놓았었다는데 이제 그들은 다 땅으로 돌아가고 현재는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v자를 그리며 사진들을 찍는다. 인생무상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래도 그 옛날엔 이곳이 명당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교회 근처(더는 교회 안에)에 묘지를 잡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니 말이다.

긴 세월의 여운이 남은 고대 묘지


언덕 위에 헤라 신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헤라 신전은 이 모든 신들의 계곡을 내려다보는 제일 좋은 자리에 세워져 있다.

헤라 신전 입구와 신전에서 내려다 본 콩코르디아 신전

이곳에서는 모든 신전이 다 보이는데 제우스 신전보다 위치가 더 좋은 것 같아 시실리는 유독 데메테르나 헤라 등 여신을 더 받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동행한 이가 설명을 해준다.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와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하게 되자 아버지인 제우스가 시실리를 결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물론 데메테르는 아버지란 사람이 어찌 딸을 그런대로 시집을 보낼 수 있냐고 노발대발했지만 상대는 제우스다. 시실리에 유독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로 추정되는 코레의 동상이나 그림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라 한다.

시실리에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 라.

풍요의 땅 시실리와 잘 어울리는 신들이란 생각이다.

정상의 헤라 신전,멀리 지중해가 보인다.

헤라 신전을 둘러보고 다시 돌아온 길을 되짚어 신들의 계곡을 떠나야 한다. 입장하여 처음으로 만났던 쌍둥이 신전을 다시 한번 보고 멋진 이곳을 떠나기로 한다.




아그리젠토 고고학 박물관


과거 수도원이었던 고고학 박물관

'신전의 계곡'에 입장할 때 고고학 박물관 입장 여부를 물어본다. 간다고 하면 티켓 값을 할인해 준다. 온전한 모습의 텔라몬을 보려면 박물관은 꼭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제우스 신전을 바치고 있던 텔라몬 상과 당시의 제우스 신전 모형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성인 남자가 텔라몬 상 앞에 서면 왼쪽(짧은 쪽) 발목 정도 되니 크기는 상상해 보기 바란다.


박물관 2층을 받들고 있는 텔라몬
텔라몬이 받들고 있는 제우스 신전 모형


매거진의 이전글 5. 카르타고를 바라보고 있는 신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