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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Nov 04. 2019

17. 모로코에서 만난 거대한  로마 유적지

볼루빌리스

이번 이야기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로마제국의 유적지 이야기다.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까지 그들의 자취를 남겼는데 모로코의 볼루빌리스가 그 주인공이다.

지도 왼편 초록색 부분이 볼루빌리스다.(빨간 부분은 로마 제국의 영토다)


모로코 볼루빌리스(Volubilis)의 로마 유적


파란 마을, 스머프의 마을로 그리스의 산토리니만큼이나 유명한 모로코의 셰프샤우엔(Chefchaouen)에서 3시간 정도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끝없는 평원 위에 폐허가 된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유적 볼루빌리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 볼루빌리스 유적지가 보인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원 한가운데 장구한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하늘을 향해 높이자란 싸이프러스 나무의 호위를 받고 있는 유적지다. 북아프리카 최대의 로마 유적지 이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유적지 입구의 아치문(좌), 유적지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싸이프러스 나무(우)


이 곳에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원주민 베르베르인들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1세기경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마을은 도시로 크게 확장되었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의 상당 부분은 2세기경 로마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들이라 한다.

3세기에 로마는 지역 부족들에게 이곳을 뺏기게 되고(이유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그 후 본토에서 너무 먼 지형적 요인으로 이곳을 재 탈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8세기에는 모로코의 이드리스 왕조(베르베르 지역을 통치한 아랍의 이슬람 왕조로 마호메드의 직계 후손 왕가다)가 지배하고 있다가 수도를 페스(Fes)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머물던 대다수의 거주자들이 근처(5km 거리)에 있는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ess Zerhoun)로 옮겨가면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물레이 이드리스 마을 전경

18세기 중반에는 지진까지 겹쳐 이곳 유적지의 돌들은 근처 도시(메크네스) 건설에 사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콜로세움에 이어 또 하나의 거대한 채석장이 이곳에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1912년, 프랑스가 모로코(모로코는 1956년에 독립하였다)를 지배하던 시기에 프랑스인들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천 년 전, 한때는 화산재 속에 사라진 폼페이에 버금가는 인구 2만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가 형성되었던 이 곳은 많은 무역상들이 거쳐가는 황금 루트의 요충지였다.

그런데 왜 하필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 이런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던 것일까?

이유는 바로 올리브였다.


보존 상태가 거의 완벽한 올리브 압착 맷돌

주변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는 올리브 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적지 안에는 당시 올리브기름을 압착하던 일종의 돌 맷돌이 거의 당시 모습 그대로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지금도 주변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폐허가 된 유적지를 구경하다 보면 모래 바람과 잡초들 사이에 빠꼼이 모습을 드러낸 로마시대 모자이크는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를 연상케 하는 것이 마치 폼페이의 유적을 보는 듯하고 그 정교함이나 작품의 내용은 로만 모자이크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이탈리아의 라벤나(Lavenna) 모자이크와 비교될 정도라고 한다.

보는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화의 단골 주역들로 장식된 모자이크들


로마 건축의 특징인 아치를 품은 몇 안 남은 건축물들과 간간이 기존 모습을 간직한 채 2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건물의 기둥들로 당시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중에 눈에 띄는 개선문이 보인다.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폐허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비교적 관리가 잘 된듯한 느낌이다.

카라칼라의 개선문(좌), '오리지널' 로마시대 기둥(우)

카라칼라(186-217AD) 개선문이라고 한다.

로마의 대 목욕장으로 유명한 아그리파의 손자 칼리굴라(12-41AD)와 혼돈을 하자 가이드는 금방 카라칼라라고 정정해 준다.

칼리굴라가 유명하다 보니 많은 이들이 착각을 한다는 설명과 함께. 카라칼라는 모든 속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한 바로 그 황제다. 모든 속국의 주민을 로마 시민으로 품으려 했던 그의 정책 때문인지 그의 개선문은 비교적 온전하게 우뚝 서 있었다. 양 기둥에는 황제 본인과 어머니 율리아의 부조가 장식된 채로.


로마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욕탕은 물론이고 대도시 유적에 주로 남는 홍등가도 있어 볼루빌리스가 어느 정도 규모였었는지 짐작케 한다.

간간이 온전하게 서 있는 기둥이나 비문이 쓰인 돌(?)이 보이면 가이드는 '오리지널'임을 무척 강조한다. 담당 가이드로서의 충실한 근무 자세겠지 하면서도 진품이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으면 그럴까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든다.



이곳을 둘러보다 보니 이탈리아 시실리 섬 내륙의 깊은 곳에서 발견된 '비키니 입은 여인의 모자이크'로 유명한 '빌라 카살레 (Villa Romana de Casale)'가 생각난다.

시실리 최초의 유네스코 등재로 유명한 이곳은 21세기인 지금도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한참을 들어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오지(?)에 있다.

4세기경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빌라 카살레는 어떻게 그 옛날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이토록 화려한 빌라를 지었던 것일까? 무척 궁금했다.

바다로의 진출을 꺼리지 않았던 로마인들은 도시나 시설들을 주로 바다 가까이에 건설하곤 했는데 이런 대단한 빌라를 섬의 내륙에 지었다는 것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빌라 카살레의 현재 모습(좌), 상상도로 그려진 화려했던 빌라 카살레 (우)


빌라 카살레의 기가막힌 모자이크 향연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빌라에 들어서면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마음이 바빠진다. 빼곡히 장식된 정교한 모자이크는 혹시 프레스코화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방은 물론이고 복도 바닥에까지 남아있는 너무나 정교하고 사실적인 많은 모자이크 장식들을 보면 왜 많은 이들이 부득부득 이곳까지 찾아오는지 이해가 된다.


높은 귀족의 여름 휴양지였다는 설도 있고 왕가의 소유였을 거라는 설도 있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로마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 ‘광대한 토지’라는 뜻)'이라는 설이다. '라티푼디움'은 로마 당시 거대한 농장규모를 일컫는 말로 실제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대 규모 농장이 운영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볼루빌리스 근처의 물레이 이드리스 마을은 모하메드의 증손자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성스러운 마을로 얼마 전 까지도 이교도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이슬람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폐허의 볼루빌리스. 거대한 로마 제국의 유적지는 이슬람 성지가 굽어 보는 가운데 이곳을 찾아오는 많은 이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전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볼루빌리스에서 바라본 물레이 이드리스(중앙 산 자락의 마을이 물레이 이드리스다)


볼루빌리스는 베르베르어로 '나팔꽃(Morning Glory)'을 의미한다고 한다.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맨 서쪽까지 방대한 영역을 차지했던 로마 제국이 물러간 뒤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온갖 수난을 겪고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볼루빌리스의 운명이 아침에 만개했다가 해가 뜨면 고개를 숙이는 나팔꽃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유적지 한편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나팔꽃이 먼 길을 찾아온 방문객을 배웅하고 있었다.


유적지 전경과 활짝 피어 있던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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