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을 몰아내는 가톨릭의 '국토 회복 운동(Reconquista)'이 한창 일고 있을 때 피난길에 오른 무어인들이 불과 40여 km 거리인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로 많이 이주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도 페리를 이용해 1시간이면 스페인의 타리파(Tarifa) 항구에서 모로코의 현관인 탕헤르(Tanger)에 도착할 수 있다. 무어인들이 적의 침략을 피해서 내륙으로 숨어들면서 자신들이 살던 고장과 가장 비슷한 지형을 찾아낸 곳이 바로 셰프샤우엔이라고 한다. 셰프샤우엔은 탕헤르에서 차로 2시간 반을 달리면 도착하게 된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셰프샤우엔 전경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가 항복 함으로써 무려 7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레콩키스타는 마침내 끝나게 된다. 이슬람 건축의 진수라고 알려진 알람브라 궁은 그라나다 왕국의 궁전이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마지막 술탄은 마호메드 12세였다. 그는 알람브라 궁을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에게 넘겨주고 쓸쓸히 유배지로 떠나면서 '무어인의 탄식(Suspiro del Moro)'이라 붙여진 고갯길에서 뒤를 돌아 궁을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모로코를 대표하는 중세 도시 페스(Fes)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결국 그의 말대로 다시는 알람브라 땅을 밟지 못했다.
무하메드 12세(좌), 항복하는 무하메드 12세(우)
그리고 유대인들
셰프샤우엔은 1471년 이베리아 반도를 탈출한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이 세운 도시라고 한다. 해안에서 조금 내륙으로 들어와 리프 산맥 자락에 있는 이 곳의 지형적 요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침략해오는 적들을 피하고 방어하기에 적격이었다. 셰프샤우엔(Chefchaouen)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의 모습이 염소의 두 뿔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어인들은 종교적 이유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왜 셰프샤우엔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쫓겨온 것인데...
레콩키스타가 끝나고 불과 석 달 만인 1492년 3월 스페인은 유대인 추방령인 알람브라 칙령을 공표한다.
이 칙령은 세계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남아있다.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개종을 한다는 조건)와 재산 보호(모든 재산을 국외로 가져갈 수 있으나 단 국가가 허락하는 것만)를 해주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칙령이었다. 칙령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개종을 하지 않은 많은 유대인들은 결국 재산을 포기하고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떠난 스페인의 경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많은 유대인을 받아들인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맞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1549년부터 있었다는 파란 집의 간판
셰프샤우엔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유대인임을 표시하기 위해 파란색을 칠했다고 한다. 마치 대문에 물고기를 그려놓았던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말이다.
셰프샤우엔은 이제는 온 동네가 지중해를 닮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독특함과 푸른 배경에 잘 어울리는 화분과 꽃나무 등으로 동화같이 예쁜 마을의 이미지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모로코의 대표 마을이 되었다. 무심코 칠한 파란색인 듯 보이나 색의 농도의 차이가 주는 미묘한 아름다움과 사막과 같은 건조한 주변 환경과 대조가 되어 파란 마을은 골목골목마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세프샤우엔의 파란집들
파란 마을 하면 떠오르는 또 한 곳. 그리스의 산토리니다.
그리스 본토(아테네)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산토리니도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파란색으로 유명한 섬이지만 산토리니는 파란색과 흰색의 조화가 더욱 멋진 섬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에게해의 섬들로 형성된 키클라데스(Cyclades) 제도의 한 섬인 산토리니는 화산 활동으로 섬의 일부가 가라앉아 현재는 초승달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요인으로 3500여 년 전 지중해의 거대 화산 폭발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가 이 곳일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의 수준이 바다 밑으로 사라진 전설의 아틀란티스가 지녔다던 수준 높은 문화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키클라데스의 독특한 조각품들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풍경
파란 마을
그러면 왜 하필 파란색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유대인들이 파란색을 신성한 색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중세 이전까지 유럽인들에게 파란색은 구하기 어려운 귀한 색이었다. 파란색은 예부터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다른 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은 다른 빛보다 더 많이 반사하기 때문에 병충해나 햇빛 차단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중해의 따가운 햇빛 아래 산토리니는 이런 이유로 파란색을 칠한 것이리라.
반면 무어인들은 초록색을 신성한 색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슬람의 코란을 보면 천국의 색을 초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는 바탕이 초록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국기
파란색으로 물든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초록의 대문.
지금은 온통 파란색이 주를 이르는 셰프샤우엔이지만 흔하지 않게 고고하게 자리한 초록의 대문은 다른 어떤 파란 문들보다 더 많은 역사의 무게를 지고 있는 듯하다.
모로코 국기가 걸린 마을 안 풍경(좌), 보기 드문 초록색 문(우)
과거의 역사가 무엇이었든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세프샤우엔은 이슬람과 유대인 그리고 가톨릭이 공존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우연히 보게 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인형은 현재 셰프샤우엔이 지향하는 모토가 아닌가 싶다. 이슬람, 가톨릭, 유대교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서있는 인형은 파란색을 음미하며 마을 구경에 빠져들던 많은 관광객들을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슬람, 가톨릭, 유대교(좌로부터)를 나타내는 재미있는 인형
이브 클라인 블루(Yves Klein Blue)
파란 마을을 한참 구경하다 보니 유명한 파란색이 하나 더 떠오른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다.
클라인 블루
파리의 퐁피두 센터의 미술관에서 두 번 씩이나 전시회를 열었다는 천재화가 이브 클라인이 만들어 낸 푸른색이다. 그는 붓 대신 여인의 나신에 페인트를 칠하고 이것을 붓처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한데 자신의 이름을 단 고유한 색을 만들어 냈으니 대단하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의 조그만 마을에서 파란 건물들을 감상하며 그의 블루를 떠올리는 우리도 괜찮은 거라고 옆에서 한 마디 거들어 준다.
레콩키스타에서 시작하여 이브 클라인 블루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셰프샤우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