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하면 연상되는 전형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인 이 흉상의 주인공은 지금으로부터 3500여 년 전 이집트를 통치했던 파라오 '아크나톤(기원전 1350-1334 재임)'이다.
루브르 이집트관의 아크나톤 흉상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노이에스(Neues) 뮤지엄에는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인정받는 아름다운 여인의 흉상이 있다.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다. 네페르티티는 아크나톤의 아내다.
네페르티티 흉상, 노이에스 뮤지엄
이집트 카이로의 고고학 박물관 2층에는 황금 마스크의 주인공 투탕카멘 (Tutankhamun, 기원전 1334-1325 재임)의 유명한 황금 마스크가 보관되어 있다. 투탕카멘은 아크나톤의 아들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은 네페르티티의 아들이 아니라 아크나톤과 친누이 사이에 근친혼으로 태어났다. 투탕카멘 자신도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딸과 혼인했는데 결국 이복동생과 혼인 한 셈이다.
왕가의 순수 혈통 보존이라는 생각으로 근친혼이 이루어진 이집트 왕조나 왕권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이어가다 왕가의 맥이 끊긴 스페인의 합스부르그 왕가는 수 천년 시간의 갭에도 불구하고 왕가 보존이라는 목적에는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좌),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있는 투탕카멘 부부 좌상(우)
투탕카멘에게 연꽃을 주는 아낙수나문, 노이에스 뮤지엄
그런데 투탕카멘과 혼인한 그녀의 이름이 귀에 익다. 아낙수나문(Ankhesenamun).
원래 뜻은 '아몬 신을 모시는 여자'란 뜻이라는데 많이 들어 본 듯한 이름이다. 바로 영화 '미이라'에서 주인공 이모텝과 불륜 관계로 등장했던 파라오의 여자인 여 주인공의 이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픽션이라 이 아낙수나문이 그 아낙수나문은 아니다. 영화의 영향력은 커서 지금도 마치 주문을 외우듯 남 주인공이 '아낙수나문'이라 외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3500여 년 전 이집트를 지배했던 최고 왕가의 유물들이 세계 도처의 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다. 이집트를 대표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유럽 곳곳의 주요 도시마다 우뚝 서 있는 이유나 같은 맥락이다.
기원전 3100년경부터 고대 왕조가 시작되어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2800여 년간 200명에 가까운 파라오가 지배했던 이집트.
중국의 진시황이 짓기 시작한 만리장성 보다도 3000여 년이나 앞선 장구한 역사를 가진 이집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일 텐데 다행히(?)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단아 같은 파라오가 있어 그가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고대 이집트는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 국가였다.
태양신 라(좌), 루브르에 전시된 태양신 아텐을 섬기는 아크나톤 가족(우)
그중 아몬(Amun) 신은 태양신 라(Ra)와 결합하여 '아몬-라'로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이다. 아크나톤은 '아몬-라'를 받드는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다신교를 금지하고 오로지 태양신 아텐(Aten)만을 섬기는 일신교를 시작했다. 그의 개혁은 이집트를 세계 최초의 일신교 국가로 역사에 남겼다.
아크나톤을 주제로 한 벽화나 유물 등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 있다. 원반 모양의 물체에서 뻗어 나오는 손이 달린 강한 빛의 선, 바로 태양신 아톤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크나톤과 네페르티티, 그리고 세 딸들(노이에스 뮤지엄)
아크나톤은 일신교를 시작하면서 기존에 '아몬-라' 신을 모시던 신관들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수도를 테베(현재 룩소르)에서 나일강 하류 쪽으로 300km 정도 내려간 아마르나(Amarna)로 이전했다. 이곳에는 아텐 신전 유적이 수 천년 전의 천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태양 신을 위한 신전이다 보니 많은 양의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붕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르나의 아텐 신전 유적
게다가 그는 천편일률적인 이집트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모습이 다른 파라오들의 모습과 다른 이유다.
네메스를 쓴 람세스 동상(좌), 독특한 아크나톤 흉상 사진(우)/루브르
파라오를 묘사할 때 전형적인 모습은 의례적으로 나오는 상, 하 이집트의 통치를 의미하는 왕관이나 네메스(Nemes)라는 머리 두건, 권위를 나타내는 긴 수염(이 수염은 여자 파라오였던 핫셉수트(Hatshepsut)도 달았다)등이 있다.
핫셉수트 대장전에 남아있는 수염 단 핫셉수트 동상들
그러나 아크나톤의 시대에는 왕권의 상징인 왕관과 긴 수염은 어쩔 수 없더라도 파라오의 모습은 가능한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아마르나 기법이라고 불리는 이런 묘사 방법의 결과 우리는 긴 턱에 아랫배가 볼록 나온, 신 보다는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파라오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 아마르나 기법은 아크나톤의 개혁정책과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르나 기법으로 표현된 아크나톤, 네페르티티, 아크나톤의 딸(좌로부터)/루브르
아크나톤과 왕비 네페르티티(루브르)
어느 시대던 개혁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 이집트라고 예외였겠는가?
강력한 신권을 지탱하고 있던 많은 신관들이 아크나톤의 개혁을 그냥 받아들일리는 만무했다. 결국 그는 그의 치세 동안에는 새로운 바람을 이집트 문화와 종교계에 불어넣는 듯하였으나 사후 그의 뒤를 이어받은 어린 왕 투탕카멘은 수도를 지금의 카이로 근처인 멤피스로 옮기고, 다신교의 사회로 회귀하는 정책을 폈으니 말이다.
후세 사람들의 아크나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는 평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하나는 신권의 세력에서 왕권을 지키고자 했던 파라오라는 평과 다른 하나는 신권을 파괴하고 자신이 신권과 왕권을 모두 가지려 했다는 평이다. 그는 신권을 회복하려는 '아몬- 라'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의 사후에 그에 관한 기록은 역사의 장에서 모두 삭제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가 아무런 장애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개혁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로든 장구한 세월과 전통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서라도 변화를 추구하려 했던 그의 신선한 시도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이집트 유물 가운데 아크나톤과 관련된 유물이 유독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가 이루려 했던 종교 개혁이나 천도 등은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의 세계는 오히려 수많은 역사의 유물 속에 뚜렷이 남아 그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 카이로의 고고학 박물관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동상은 권력은 무상하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묵묵히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