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이 초승달이라는 불어이고 좀 더 나아가 이슬람과의 전쟁 후에 만들어진 빵이라더라 하는 이야기도 낯설지는 않다. 그럼 이슬람과 커피는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걸까?
이번 이야기는 먼 옛날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유럽 정복의 꿈을 저지한 두 번의 중요한 전쟁이 있었다.
하나는 8세기, 유럽의 서쪽을 공격했던 '푸아티에 전쟁( Battle of Poitiers)'으로 732년 10월, 이슬람 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후 기세를 몰아 프랑크 왕국을 공격한 전쟁이다.
보르도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공격한 이슬람 군은 프랑스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프랑크 군과 맞붙게 되는데 이슬람 군은 이 전투의 패배로 서유럽 정복의 꿈이 저지되었다.
이 패배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성공하는 1492년까지 7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뒤로한 알람브라
1492년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아랍 지배지역이었던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수백 년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때 유명한 알람브라(Alhambra) 궁이 함락되는데 알람브라 궁을 병풍처럼 보호하고 있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피난길에 오른 이 성의 군주에게는 눈물의 산이 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당시 이슬람군과의 전쟁은 중세 전쟁 영웅인 롤랑(https://brunch.co.kr/@cielbleu/73 참고)을 탄생시키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이름이지만 유럽인들에게는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라는 시를 통해 전형적인 중세 기사상으로 인기 있는 인물이다.
롤랑의 최후를 그린 그림과 론세스바예스의 롤랑 추모비
778년 그는 샤를마뉴 대제를 도와 론세스바예스(Battle of Roncesvalles) 전쟁에 참여한 장군으로 이슬람군과의 전쟁이 패하면 불게 되어 있는 나팔을 끝까지 불지 않고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운 장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전형적인 모델로 남아 있다. 롤랑은 이슬람군에 쫓기다가 마지막엔 바스크 족의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얼마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친지가 론세스바예스 패스(롤랑이 사망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롤랑의 추모비를 보았다면서 보는 감회가 다르더라고 했다.
뭐든 알고 보면 더 신기하고 재미있고 그런 거니까.
다른 하나는 17세기, 유럽의 동쪽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비엔나 전투(Battle of Vienna:1683년)다. 이 전투는 이미 일 년 전 오스만 제국이 선전포고를 한 전쟁이었음에도 결과는 어처구니없게 끝나버린 전쟁이었다.
크루아상과 커피를 남긴 채.
당시 오스트리아 왕은 1682년 오스만 제국의 선전포고를 받고 사색이 되었고 많은 비엔나 인들은 피난을 서둘렀다고 한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슬람 군은 비엔나를 포위했지만 철옹성인 성벽은 대포로도 뚫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지상 공격이 어려워 지자 성벽 밑에 터널을 파고 그것을 폭파하여 성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공격법을 썼다. 바로 이런 공격법 때문에 크루아상이 태어나게 된 것이라니 아이러니다.
적군의 터널 파는 소리를 들은 빵 집주인이 이를 신고한 데다 마침 폴란드의 무서운 기병대 후사르(Hussar)가 지원군으로 도착하는 바람에 다 잡은 전쟁의 결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후사르의 공격',1810년, Aleksander Orlowski,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이슬람 부대가 가장 무서워한 후사르 부대 3000명은 길이 4.6m에 이르는 폴란드식 긴 창 코피아(Kopia)와 천사의 날개라고 불리는 독수리 깃털 날개를 달고 위기에 처한 비엔나를 구해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얼마든지 비엔나를 함락시킬 수 있었던 이슬람의 지휘관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행동이다.
카라 무스타파 파샤
이슬람 법에는 저항하다 함락되는 도시는 사흘간 약탈이 허락되지만, 항복하면 적국의 모든 재산이 국고로 환수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비엔나를 항복시켜 모든 재물을 자신의 몫으로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재상이었던 무스타파의 과욕이 부른 어이없는 패배였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입성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이렇게 또다시 날아갔고 어떡하든 패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보려던 무스타파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터키의 국기
크루아상은 비엔나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패전국인 오스만의 국기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알라신으로부터 최초의 계시를 받았을 때 초승달과 별이 떠 있었다는 주장으로 이슬람에서는 초승달과 별을 중시한다. 이렇듯 이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초승달 모양의 빵이니 심기가 편치 않을 듯싶다. 그러나 사실 초승달 모양의 빵은 13세기부터 오스트리아의 빵인 킵펠(Kipferl)이라는 빵이 있었다고 하니 역사와 엮은 하나의 설로 이해해야 할 듯싶다.
지금과 같은 페이스트리 형태의 크루아상은 19세기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루아상의 원조 킵펠
그러면, 이슬람과 커피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야기는 다시 비엔나 전쟁 당시로 돌아간다.
비엔나는 지원군을 보내는 폴란드 사령관에게 이슬람군의 병력을 전하기 위해 게오르그 프란츠 콜쉬츠키라는 폴란드인을 전령으로 보내는데 그는 이슬람 권에 살았던 경험으로 교묘히 이슬람 포위를 뚫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그 결과 콜쉬츠키는 비엔나의 전쟁 영웅이 되었다.
비엔나 콜쉬츠키 도로에 만들어진 콜쉬츠키의 동상(1885)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비엔나에 커피를 소개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군들은 모든 것을 남기고 서둘러 철수했는데 그 가운데 낙타의 먹이로 추정되는 자루에 넣어져 있는 이상한 콩알들이 있었다. 페르시아나 터키 등에는 커피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아직 유럽에는 커피가 소개되지 않았던 터라 그것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커피 가게는 15세기 이스탄불에 문을 연 'Cafe Kiva Han'이다.
콜쉬츠키는 이스탄불에 살았던 적이 있어 그것이 커피임을 금세 알아채고 커피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모두 사들인 후 다음 해 카페를 비엔나에 오픈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 카페의 이름이 '블루 보틀(Blue Bottle)'이다.
콜쉬츠키의 카페(뒷벽에 블루 보틀이 그려져 있다)
많이 들어 본 이름 아닌가? 그렇다.
요즘 새로운 커피 체인으로 떠오르는 '블루 보틀'과 같은 이름이다. '블루 보틀'의 창업자도 이런 역사를 알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블루 보틀' 로고
왜 하필 커피 전문점의 이름이 '블루 보틀'일까?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이런 역사가 뒤에 있는 것을 알고 나면 무엇이든 의미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스타벅스 로고에는 왜 그리스 신화 속의 사이렌이 그려져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는가?
이렇듯 하나의 문을 열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재미가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퍼즐 여행'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누구나 가볍게 마시는 커피 한잔.
그러나, 커피 한잔과 그에 곁들이는 크루아상에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면 조금은 특별한 커피 한잔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