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풍광을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글렌코(Glencoe)를 바라보며 들었던 맥도널드와 캠벨 두 집안에 얽힌 처절한 이야기다.
글렌코 전경
스코틀랜드에는 수백 개의 가문(clan)이 있다고 한다. 가문이라기보다는 씨족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중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맥도널드(MacDonald, McDonald) 가문도 있다.
우리에겐 패스트푸드점으로 더 알려진 친숙한 이름이다.
전 세계에 수 만개의 점포가 있다는 맥도널드는 낯선 타지일지라도 이 사인을 보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패스트푸드 점이다.
일단 이곳의 퀄리티나 맛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보장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맥도널드 가문은 눈보라가 치던 그날의 사건으로 스코틀랜드의 많은 가문 가운데 가장 아픈 역사를 지닌 가문일지도 모른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맥도널드 사인
맥도널드 가문에 처절한 상처를 남긴 캠벨(Campbell) 가문 역시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다.
앤디 워홀(Andy Warhole)의 작품 속에 그려진 '캠벨 수프'의 그림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미국의 올드 싱어 글렌 캠벨도 있으니 말이다.
뉴욕 모마에 있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1962)
스코틀랜드의 가문들은 집안 고유의 문장과 각기 다른 문양인 타르탄(Tartan)을 가지고 있다. 킬트(Kilt: 무릎길이의 타르탄으로 만든 남성용 치마)를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스코틀랜드인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우리는 다양한 타르탄을 통틀어 스코틀랜드식 체크무늬라고 부르지만 각기 다른 색상과 독특한 짜임을 보면 어느 집안의 타르탄인지를 식별할 수 있으니 다양한 타르탄을 이리저리 비교해 보는 것도 스코틀랜드 여행의 재미 중 하나라 하겠다.
에딘버러 기념품 가게에 걸린 스코틀랜드의 다양한 체크문양(Tartan)과 전통 의상을 입은 거리의 백파이프 연주자
두 집안의 타르탄과 문장
과연 두 집 안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궁금해지는데 역사에 기록된 끔찍한 사건(Massacre of Glencoe)이라니 귀가 솔깃해진다.
이번 이야기는 스코틀랜드의 멋진 하이랜드(Highland:스코틀랜드 북쪽 지역으로 인버네스(Inverness)가 행정 중심도시인데 인버네스 근처에 네스호의 괴물로 유명한 네스호가 있다.) 풍광으로 유명한 글렌코(Glencoe)에서 일어났던 비극적 이야기다.
이 끔찍한 사건은 1692년 2월 13일 새벽 5시, 눈보라가 몰아치는 글렌코 계곡에서 벌어졌다. 계곡에는 농사를 짓는 맥도널드 집안의 농부들이 70여 명 살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당시 영국의 왕이자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윌리엄의 명령을 받은 120여 명의 군인들은 이 마을에서 2주간 머물렀다고 한다.
눈 덮인 글렌코 전경
군인들이 모두 캠벨 집안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사령관을 비롯 6명의 캠벨이 군인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글렌코에 머무는 동안 맥도널드 집안사람들은 정성으로 이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당시 군인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마치 세금을 내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맥도널드 가문을 몰살시키라는 윌리엄 왕의 명령을 받고 온 자들이었다.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윌리엄은 제임스 2세의 딸인 매리의 남편으로 네덜란드 왕족이다. '윌리엄과 매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왕이다.
맥도널드 집안이 윌리엄 왕에게 충성 서약을 늦게 했다는 이유로 다른 가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었다고 하니 섬뜩한 명령이었다.
맥도널드 가문은 충성 서약을 하기로 한 날 심한 눈보라로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서약을 늦게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외관상으로 보여진 구실이라는 해석이다.
이에 윌리엄 왕은 다른 가문들에게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본보기로 하이랜드의 가장 큰 가문인 맥도널드 가문을 희생양으로 삼아 학살을 자행했다는 후세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제임스 2세(좌), 윌리엄 3세(우)
더구나 15세기경부터 왕족들이 당시 가장 큰 가문이었던 맥도널드 가문의 땅을 몰수하고, 그로 인한 정치적 공백과 땅을 캠벨 가문이 대부분 차지하는 등 캠벨과 맥도널드 가문은 오래전부터 불화가 계속되어 온 사이라 사령관을 캠벨 가문 사람으로 보낸 스코틀랜드 왕은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 않고 제 3자의 손을 빌려 명분을 세운 셈이었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도 온당치 않은 살육이란 것을 인지한 캠벨 사령관의 망설임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트는 새벽에 결국 대 학살은 시작되었다.
가옥은 불에 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살육으로 군인들의 총 칼 앞에 38명이 희생되었다. 요행이 도망친 이들도 혹한에 거의 동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온 마을이 초토화된 것이다.
살육 현장을 탈출하여 절벽 끝에 내 몰린 맥도널드 사람들
살육현장을 탈출해 피신처를 찾아 계곡을 헤매는 맥도널드 사람들
당시 스코틀랜드 풍습은 아무리 적이라 해도 도움을 청한 적에겐 먹을 것을 제공하고 일단 휴전에 들어갔다가 그들이 다시 회복하면 전쟁을 하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풍습이 있던 터라 재워주고 먹여주면서 호의를 베푼 주인을 몰살시킨 캠벨 집안 군인들의
살육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글렌코 대 학살은 스코틀랜드 법과 오랜 하이랜드인들 사이의 관습을 파괴한 대단히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그대로 하이랜드 지역에 남아 ' Be aware of Campbell!' 이란 표현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두 집안 사이엔 세월의 흐름 속에 화해의 기류가 충분히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캠벨 이름을 가진 학생의 전학을 맥도널드 성을 가진 교장이 끝내 반대하여 입학이 안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북서쪽 인적이 드물고 자연 풍광이 마치 다른 행성 같은 글렌코에서 일어난 대 학살 이야기는 이곳을 찾아온 방문객의 기억 속에 멋진 풍광보다 더 오래 깊게 남아 있는 듯하다.
글렌코에 있는 맥도널드 학살 추모탑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복잡한 역사의 흐름이 만든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일 글렌코 학살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뒤, 제임스 2세의 손자인 보니 프린스(Charles Edward Stuart)를 또다시 맥도널드 가문이 도와주는 사건(https://brunch.co.kr/@cielbleu/254 참조)이 벌어지고 최근에도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지지를 받는 것을 보면 스코틀랜드와 영국 사이의 복잡한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