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가 추구하는 것 즉 미덕의 모범이 되는 것인데 '백자가 맑고 티 하나 없듯 인간도 대단히 공평하고 지극히 발라서 한 점의 허물도 없게 되면 선하지 못한 것을 용납지 못할 것이다'라는 성종실록에 쓰인 글이 설명으로 따라온다.
심오한 뜻으로 해석되는 백자를 마주 하려니 보는 이도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어둠 속에 각자 조명을 받고 자태를 드러내는 백자들의 향연은 리움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누군가 회화 작품의 격을 올리는 데는 작품의 프레임도 한몫을 한다고 했다.
서양의 미술관에서는 작품을 압도할 것 같은 화려하고 근사한 프레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블랙박스 전시실
'블랙박스'로 명칭 된 깜깜한 전시실에 각자 조명을 받고 진열되어 있는 40여 개의 백자들은 서로 자기를 보러 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누구부터, 무엇부터 보나 마음은 급한데 앞으로 보게 될 귀한 작품들 생각에 마음은 벌써 풍요롭다.
하나하나 개별 전시된 부스 안의 백자들은 자신을 소개하는 팻말에 '국보', '보물' 등의 단어들을 별 것 아니라는 듯 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는 국보와 보물이 해당된다) 59점 가운데 국보 10점, 보물 21점과 일본이 소재하고 있는 백자 34점 등 총 185점이 전시되어 있다.
귀한 만남이었다.
국보와 보물 백자청화
푸른색 청화(코발트 염료)로 만들어진 청화백자들은 재료가 지금의 이란지역이 산지이다 보니 교역을 통해 구할 수 있었던 귀한 염료였다.
워낙 고가라 주로 조선 전기(15,16세기)에 왕실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푸른색 염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한 염료였다.
서양 회화에서 푸른색으로 묘사된 주인공은 대게 성모 마리아나 신분이 높은 귀족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용은 제왕의 권력을 의미하는 신성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도자기에 그려진 용 문양중 발가락이 5개인 용(오조룡)은 왕을 위한 도자기에만 그려 넣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중국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용 발가락 개수를 3,4개로 제한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에도 오조룡은 있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오조룡이 있는 도자기들이 만들어지는데 현재 전 세계에 10개 미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오조룡이 그려진 청화백자 운룡문 호가 의연한 자태를 뽐내며 전시되어 있다.
201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89만 달러에 낙찰된 귀한 백자다.
'백자청화 운룡문 호', 조선, 18세기, 리움미술관
그런가 하면 철화로 그려진 백자 운룡문 호가 이번 전시회에 나왔는데 이 백자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전설적인 백자로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다.
용의 발가락이 3개인 백자철화 운룡문 호는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도자기 최고가 850만 불(현 시가 110억)을 기록했던 작품으로 개인 소장품이라 보기 힘든 귀한 작품이다.
백자철화 운룡문 호, 조선, 17세기, 개인소장
재료 수급의 어려움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어쨌든 그 후 수준도 떨어지게 되고 청화도 구하기 어려워 지자 18세기부터는 철화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철화는 높은 온도에서 조절이 쉽지 않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여 청화만큼 세밀한 그림을 얻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인지 청화그림보다 우리에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철화문양들이다.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중에는 높은 회화 수준을 자랑하는 문양들이 많아 수 세기가 지난 현시점에서 보아도 그 탁월함을 인정하게 된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명, 청 교체기에 중국이 해금 정책을 쓰는 바람에 중국의 도자기를 대신하여 일본의 도자기가 날개를 달고 전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에서 비롯된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우리로선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기에 자포니즘이 돌풍을 일으키고 일본 도자기를 포장해 온 포장지에 그려진 우끼요에(Ukiyo-e: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 사람들의 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 그린 풍속화) 작품들은 당시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니 시대적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화려한 색채를 보이는 백자는 바로 이 작품이다.
청화, 철화, 동화를 모두 사용한 백자 병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백자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지만 백자 본연의 고고함이 느껴지는 국보다.
블랙박스 전시실 맨 안쪽에는 보고 싶던 달항아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소박함을 특징으로 하는 달항아리가 이렇게 고고한 자태를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보는 눈이 호사를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