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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Mar 25. 2023

50. 그림 속에 남은 사이프러스

죽음과 영생의 나무


토스카나 여행 중 드넓은 평원 발도르차(Val d'Orcia)에서는 우뚝 솟아 있는 훤칠한 나무들의 행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높이, 곧게 뻗어 있는 나무.

사이프러스(Cypress). 편백나무과 나무다.

사이프러스 나무도 여러 종이 있다는데 우리가 그림이나 사진 등을 통해 보는 아름다운 토스카나 전경 속의 나무는 그중에서도 '이탈리안 사이프러스'라고 한다.


산지미냐노(San Gimignano)에서 내려다본 전경. 사이프러스의 행렬이 보인다.
사이프러스 행렬이 장관이다.(위키미디어)


사이프러스는 큰 키로 눈에 잘 띄어서 인지,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인지 유명 화가들이 그림의 주제로 즐겨 다루었고 영화의 배경으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자기의 집을 회상하는 장면에도 넓은 평원에 우뚝 서있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캡처

그런데 이 아름다운 장면을 영화에선 흑백으로 처리했다.

뭔가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이 사선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자신의 집을 떠 올리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사이프러스는 죽음과 영생(everlasting life)을 의미하는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묘지 근처에 많이 심고 관을 짜는데 주로 사용한다는 설명까지 들으니 아름다운 풍광에 찬물을 끼얹는 거 같은 충격이 가볍게 스쳐간다.


그러나 너무 죽음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인간은 어차피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할테고 거기다 사후 영생을 기원해 주는 나무라니 자연의 섭리대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이프러스를 감상하면 되지 싶다.


그런데 궁금은 하다.

왜 아름다운 이 나무에 죽음과 영생이란 무거운 상징을 부여했는지 말이다.


죽음을 의미하는 배경은 로마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신 플루토(Pluto:그리스 신화에선 하데스)에게 헌정된 나무이기도 하고 한 번 베어지면 다시 살아나지 않는 나무의 속성으로 사후세계와 연관 지었다는 설이다.

아름다운 나무에 얽힌 전설이 안타깝다.


영생을 의미하는 배경도 흥미 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키파리소스(Cyparissus)라는 아폴로신이 아끼던 소년이 있었는데 사냥 중 실수로 자신이 아끼던 사슴을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기고.


슬픔에 빠진 소년은 아폴로에게 영원히 사슴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해 달라 했단다. 아폴로 신은 그의 청을 들어 영원히 사슴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도록 그를 애도의 상징이었던 사이프러스 나무로 만들어 줬다는 이야기다.

소년이 영원히 애도할 수 있도록.

Cyparissus, 1625, Jacopo Vignali, Musée des Beaux-Arts de Strasbourg

보기와는 달리 무거운 주제를 가진 사이프러스 나무를 많은 작가들이 주제로 다루었는데  그중 한 사람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아놀드 뵈클린(Arnold Böcklin:1827-1901)'이 있다.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되어 있는 '죽음의 섬'
Isle of the Dead, Arnold Böcklin, June 1880, Metropolitan Museum of Art, NY

'죽음의 섬(Isle of the Dead)'이란 제목의 작품.

히틀러도 애장하여 그의 집무실에 걸어 놓았다는 그 작품.

20세기 초 대 다수의 독일 가정에 걸려 있었다(복제품이긴 하지만)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색감이나 내용이 거실이나 집안에 걸고 싶은 장면은 아니다.

이런 그림을 당시 독일인 들은 집안에 걸어 놓고 싶었을까?

그래서일까?

이런 현상을 1차 대전즈음 히틀러를 포함한 독일인들의 광기를 엿볼 수 있는 심리상태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다고 한다.


작품해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작품 속 장면은 심플하다.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이 배에 관을 싣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무성한 고요한 섬으로 망자를 인도하는 내용이다. 섬에는 망자를 안치할 묘소가 준비되어 있고.


그림을 보는 순간 망자의 영혼을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스틱스(Styx) 강의 뱃사공 카론(Charon)이 떠오른다.

그는 뱃삯을 받아야지만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다준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망자에게 저승 가는 여비를 넣어주는 관습이 있는데 바로 카론에게 지불해야 하는 뱃삯인 셈이다.


그러나 뵈클린 그림 속의 사공은 카론이 아닐 수도 있다.

흰 상복의 여인은 망자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1880년 뵈클린이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지인인 미망인의 부탁으로 완성된 그림이다.

'베르나'라는 이 미망인은 재혼을 앞두고 사별한 배우자를 애도하는 뜻으로 그림을 부탁했는데 원래 뵈클린의 그림에는 흰 상복의 여인과 관은 없었다고 한다.

미망인의 요청으로 그려 넣었다는데 뵈클린의 작품은 주문자의 요청과 완전 부합했던 것 같다.


화가 자신도 첫 번째 연인의 결혼 전 사망과  결혼 후 낳은 14명의 자손들 중 8명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등 이미 많은 죽음을 경험한 순탄치 않은 인생이었기에 죽음을 대하는 그의 관점도 그림에 녹아있다는 설명이다.

어둡지만 고요하고 평온하게.

  

그는 젊은 시절 로마에 머물면서 신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무거운 주제를 신화적, 우화적으로 접근하는 기법을 사용하곤 했다.

'죽음의 섬'이 주는 첫인상도 현실 같지 않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무거운 내용과 달리 예상 밖으로 이 그림이 환영을 받자 그는 약간씩 변화를 준 모두 5편의 '죽음의 섬'을 그려냈고 마지막 6번째 작품은 그의 아들과 같이 완성했다.

그중 히틀러의 집무실에 걸려 있었던 것은 3번째 작품이다.


히틀러가 소장했던 작품(1883, Alte Nationalgalerie, Berlin)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뵈클린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사이프러스를 그려낸 고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고흐가 아를의 '생 레미(Saint-Rémy)' 병원에서 투병 중 그린 것들이다.


그는 사이프러스의 윤곽선이나 비율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 아름답다고 찬사를 하면서 나무들이 마치 몸부림치듯 표현했는데  당시 그의 정신병 투병의 영향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작 작가는 고통 속에서 그린 작품인데 그의 이런 표현을 고흐의 독창적 기법으로 여겨 많은 이들이 좋아한다.

예술의 아이러니다.

Wheat Field with Cypresses, June 1889(좌), Cypresses, 1889, late June(우)


뉴욕의 모마(MOMA)에는 고흐의 유명한 사이프러스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그림 앞은 늘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는 작품.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다.

세 작품 모두 1889년 생 레미 병원에서 그린 작품이다.


The Starry Night, 1889, MOMA NY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는 고흐의 사이프러스 특별전을 2023년 5월 22일부터 8월 27일까지 연다고 한다.

이 세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니 뉴욕에 있다면 'must see' 전시회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전시회 화보

메트로폴리탄에는 뵈클린의 '죽음의 섬:version 2'과 고흐의 '사이프러스' 작품이 모두 전시되어 있다.

작가의 기법으로 독특하게 표현된 사이프러스들.


나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떠나 작품 속에 남은 사이프러스는 보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게 하는 작품들이다.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된 '죽음의 섬'과 고흐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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