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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ul 15. 2018

4. 진정한 왕가의 성, 블루아

(Château Royal de Blois)


왕가의 성, 블루아(Château Royal de Blois)

     

블루아 성 전경(위키미디어)

1498년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자신이 태어난 블루아로 왕궁을 옮기는데 그때부터 이곳은 왕가의 마을로, 더 나아가 왕국의 수도가 된 곳이다. 모두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이곳을 거처로 사용했다. 루이 12세가 블루아를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요새와 같았던 성의 이미지는 밝고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새로운 스타일로 바뀌었다. 프랑수와 1세가 1515년부터 증축하기 시작한 ‘프랑수와 1세 윙(wing)’은  프랑스 르네상스가 만든 첫 번째 걸작으로 뽑히는 건축물이다. 이 윙은 프랑수와 1세의 왕비 끌로드(Claude de France)가 사망한 1524년에 완공되었다.

프랑수와 1세 윙

  

그런가 하면 잔 다르크(Joan of Arc)가 1429년 올레앙(Orleans)에서 영국과의 전투를 앞두고 랭스(Reims)의 대주교에게서 시복(blessed)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564개의 방과 75개의 계단, 침실만 100개에다가 각 방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어 왕가의 성으로 손색이 없다.


루이 12세부터 프랑수와 1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부흥되던 블루아 성은 프랑수와 1세와 왕비 클로드에 의해 증축되고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의 모태가 된 대규모의 서고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1524년 왕비 클로드가 세상을 뜨자 방대한 도서실은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성(Château de Foatainebleau)으로 옮겨졌으며 1525년 파비아(Pavia)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게 대패하고 난 뒤로 프랑수와 1세는 블루아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블루아 성은 13세기에 지어진 특이한 구조의 방이 유명한데 ‘쌀데제타제네호(Salle des Etats Generaux)’라 불리는 이 방은 프랑스에서 고딕 양식의 방으로선 가장 크고 오래된 방이다. 이 방은 주로 법정으로 사용되다가 16세기에 와서는 합동 의회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이 합동 의회는 서로 다른 계급으로 구성된 개별 의회가 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열리도록 구성된 합동 의회였는데 루이 12세는 이 의회를 통해 세금 감면을 선언함으로써 ‘민중의 아버지:(Le Pere du Peuple)’라는 애칭으로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합동 의회가열리던 방(Salle des Etats Generaux)

     

1588년 12월, 앙리 3 세 때에는 블루아 성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왕을 만나러 온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인 기즈 가문의 기즈 공과 그의 동생이 왕의 경호원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구교를 대표하던 기즈 공을 살해한 것으로 종교 전쟁의 혼란 속에 있었던 프랑스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기즈 공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만나자’는 왕의 제의에 기꺼이 응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해 앙리 3세 자신도 광신적인 구교도에게 살해당하면서 처참한 종교 전쟁 속에 앙리 3세의 누이인 ‘여왕 마고’의 남편 앙리 4세가 1592년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의 종교 전쟁은 일단 마무리된다.

앙리 3세(좌)와 기즈 공(우)

블루아 성에는 또 한 곳 역사적 의미가 있는 방이 있다. 바로 프랑스를 좌지우지했던 메디치가의 여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침실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1589년 1월 숨을 거두었지만 당시 파리는 부르봉(Bourbon) 왕가(카트린느는 발루아(Valois) 왕가)의 통치하에 있었기에 왕들의 묘지인 파리 근교 ‘생 드니’ 성당에 안치되지 못하고 1610년이 되어서야 남편 앙리 2세 곁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살아서도 남편의 연상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https://brunch.co.kr/@cielbleu/24 참조)로 맘고생을 하더니 사후에도 남편 곁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던 것 같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침실

프랑스의 왕비가 된 또 한 명의 이탈리아 여인 마리 드 메디치도 블루아 성과 악연을 맺게 된다.  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는 1610년 앙리 4세가  살해된 뒤 어린 아들을 앞세워 섭정을 하려다 당시 뛰어난 재상이었던 리슐리외에게 오히려  추방당해 유폐된 곳이 바로 이 곳 블루아 성이다.

<블루아 성에 유폐되는 마리 드 메디치>, 루벤스, 루브르


왕가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이야기들이 무성한 블루아 성은 루아르에 남아있는 50여 개의 성 중에서 단연 왕가와의 인연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진정한 왕가의 성이라 할 수 있다.


성 입구의 루이 12세 기마상과 그의 고슴도치 문장(좌), 성 밑에서 바라본 블루아 성
카트린느 드 메디치 방의 화려한 벽난로(그녀와 남편 앙리 2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좌),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장




기억해야 할 왕과 왕비의 문장(Embleme)


프랑스의 성을 투어 하다 보면 왕을 나타내는 이니셜과 문장들이 많이 눈에 띈다. 문장의 의미를 알고 본다면 성에 대한 이해와 당시 성주였던 왕과 왕비의 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모티브가 된다.


루아르 지역에는 루이 12세와 그의 왕비 브르타뉴의 앤, 그들의 딸 끌로드, 그리고 사위 프랑수와 1세의 문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블루아 성에 남은 루이 12세(좌)와 브르타뉴의 앤(우)의 문장


루이 12세는 고슴도치를 그의 문장으로 썼다.

이 문장의 모토(motto)는‘나 자신은 내가 지킨다:Cominus et Eminus’는 뜻이라고 한다.

그의 왕비 브르타뉴의 앤은 흰 담비를, 그들의 딸 끌로드는 화살 맞은 백조를 자신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사용했다.

흰 담비는 당시 유럽 왕가에서 많이 애용하던 문장으로 흰색은 왕족을, 담비는 전령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끌로드의 문장 ‘화살 맞은 백조’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문장이라기엔 좀 섬뜻하게 느껴졌는데 의미를 알아보니  화살은 큐피드의 화살 같은 사랑을 의미하고 흰 백조는 왕족의 순수성을 뜻한다고 한다.

원래 이 문장은 끌로드의 시어머니인 프랑수와 1세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것인데 어머니 루이스의 문장에서 화살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흰 백조는 상을 당한 왕족을 의미했다고 한다.
같은 문장, 그러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수와 1세의 문장은 불을 내뿜는 도마뱀인데 의미는 ‘좋은 불은 뱉어 내고 나쁜 불은 삼켜 버린다: nutrisco et extingo’는 뜻이다. 도마뱀은 불사조인 휘닉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곤 하는데 불에 대항하는 이런 동물은 삶에 대한 열정과 영광을 나타낸다고 한다.

    

블루아 성에 남은 프랑수와 1세(좌)와 왕비 끌로드(우)의 문장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파비아 전투 장면

1525년 2월 24일 이탈리아 정복을 위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벌인 전쟁으로 파비아 성을 포위한 프랑스 군을 신성 로마제국이 역 포위하면서 프랑스 군의 대패로 끝난 전투이다. 프랑스 군의 사상자는 12000명에 달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프랑수와 1세는 포로가 되어 마드리드로 호송되었고 이탈리아뿐 아니라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 네덜란드), 부르고뉴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내용의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에 1526년 사인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온 프랑수와 1세는 이 조약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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