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33. 사람은 내부에 품고 있는 모순의 힘으로 산다
얼마 전에 자기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썼습니다.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천지 분간 못하던 어린 시절, 흐릿한 학창 시절을 지나, 방황하는 청년기, 가족과 일이라는 사회생활에 몰입하던 시간들, 그리고 어느 정도 숨을 고르고 있는 현재까지… 평범한 내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쓰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같이 쓰는 분들의 힘을 받아 초고에 퇴고에 에필로그와 작가소개까지 써냈을 때는, 우와 하며 진짜 속이 시원했습니다. 열심히 잘 살았구나 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긍정하는 한편, 쉽지 않은 아웃풋을 냈다는 그 뿌듯한 감각에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아웃풋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똥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똥 얘기…. 해도 될까요? 더럽긴 하죠. 하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얘기라서… 송구스럽지만 좀 할게요.
사람은 뱃속에 남은 똥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10년도 전인데요, 저는 아버지에게 간이식을 해드리고 수술 절개부위가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명치부터 배꼽을 스쳐 크게 니은자로 배를 절개하는 수술을 했음에도, 평생 처음 받아보는 몇 개월의 휴직이 아까워서 뽈뽈대며 여행을 다녔습니다. 할미꽃처럼 구부정해서는 국내 여행을 다니다가, 몸이 다 펴지고 나자 여동생과 함께 일본과 하와이로 여행을 떠났죠.
우리는 참 많이 걸었습니다. 대충 어디쯤에 가자고 정한 다음, 언저리에 도착해서는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바쁠 것도 없고 뭔가를 꼭 봐야 한다는 목적도 없는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간이식 수술을 하며 췌장도 같이 잘라내, 저는 인생 처음으로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살이 쪽쪽 빠지고 있었습니다. 입맛도 없어서 많이 먹지도 못했습니다. 소장이고 대장이고 할 것 없이 내장을 탈탈 털어 몸 안에 있는 에너지를 끌어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느 날, 왕궁 벽으로 추정되는 길을 따라 1시간 남짓 걷고 있었는데,
“야, 나 뱃속이 텅 빈 것 같아. 위기상황이다.” 하고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헉 어떡해? 배 많이 고파?” 대개는 지랄 맞지만 근본적으로는 다정한 동생이 걱정을 해주었어요.
“아니 이게 배가 고픈 수준이 아니고… 아예 내장에 붙은 찌꺼기까지 다 연소시켜 쓴 것 같은데?”
“헐 그게 뭐지.”
“완전 빈 거지. 똥도 없는 거지.”
“진짜… 큰일이네.” 동생은 웃음을 참는 듯 무심한 듯 장단을 맞춰주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박장대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지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제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야, 나 깨달았다.”
“뭘?”
“인간은 똥힘으로 산다! “
동생은 뭔 개소리냐는 듯 쳐다봅니다.
”야 아니야 한번 들어봐. 우리가 뭔가 성취를 하잖아, 아웃풋이 똭 나와, 그게 똥이야. “
”그게 똥이야? “
”그치 먹고 일하고, 먹고 똥 싸고, 경험하고 느끼고, 뭐가 다르냐? 아니 암튼, 먹고 똥 싸는 데는 로직이 있어. 인풋, 아웃풋. “
저는 말을 이었습니다.
”근데 질서 정연한 아웃풋을 내보내고 나서, 내 안에 남는 게 있어. 말도 안 되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거, 모순 투성이에다 재수 없으면 병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 그게 똥이야. 근데 그 똥이 없는 사람은 모든 걸 다 내보내고 텅 빈 사람이야. 너무 간당간당해서,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어. “
저는 비장하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사람은 뱃속에 남은 똥의 힘으로 산다. 내부에 품고 있는 모순의 힘으로 산다. “
그 이후에도 저는 점점 더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인간 내부의 모순이야말로 인간과 죽음 사이의 안전지대 같은 것이라고요. 그 모순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들여다보자고요.
내 삶에서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이상한 똥 얘기만 잔뜩 했네요. 죄송합니다. 어린 시절 저를 형성한 엄마와 아빠, 동생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렸습니다. 제 내부의 모순(a.k.a. 똥)까지 소중히 하는 걸 보니, 저는 저 자신을 무척 소중히 여기는지도 모르겠군요.
우리의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