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37. 엄마가 다시 한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데 힘이 되고 싶습니다
5년 전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혼자 계십니다. 제가 아빠에게 간이식 수술을 해 드렸었는데, 바꿔 끼운 간으로 5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엄마는 긴 병시중과 사별이라는 충격에서 천천히 벗어나는 중입니다. 엄마에게 서서히 봄이 찾아오듯이 요즘 엄마와 저의 관계는 꽤 좋은 편입니다. 유래 없이 좋은 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가끔 통화를 하는 것뿐이지만, 특유의 긴장이 사라졌습니다. 그전에는 일주일 연락하지 못하다 전화를 하면 왜 이제야 전화했냐고 뭐라고 할까 봐 또 한주를 더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나고 생각이 날 때 전화를 합니다. 깔깔거리고 다정하게 안부를 나누고요.
오랜만에 엄마를 보러 왔습니다. 같이 부산 바다를 보러 갔어요. 햇빛이 좋아서 그런지 많이 걷고 파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흰여울마을 중간의 고양이 전문 아트샵에서 엄마는 ‘고양이 달력’을 저는 ‘서재에 고양이가 있는 그림’을 샀습니다. 오륙도에서는 배가 고파서 편의점 라면과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고요. 저녁에는 영화관에서 보이스피싱 총책을 때려잡는 시민덕희를 보며 통쾌하게 웃었고요. 그림에 그린 듯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되짚어 글을 쓰다 보니 이 하루가 더욱 멋지게 느껴집니다. 어떤 하루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지만 이런 하루는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엄마가 ‘00이 재밌을 것 같아서 해봤는데…’ 하고 얘기해 주는 겁니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으로 흥미를 느끼는 것을 찾아서 해 보고,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흥밋거리를 늘려나가며, 결국엔 살아가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흐뭇한 만족감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도 나도, 각자의 삶이 충만하고 그걸 서로 나누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저도 나 자신에게 진솔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해요. 세상에 휩쓸려 허덕이며 사는 게 아니라 지향을 따라 즐기며 살아야 해요. 엄마도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요.
해변을 산책하면서 내가 글쓰기를 하고 있다며 엄마에게 글쓰기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일기도 안 쓰는데~’라고 했지만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아빠가 배를 탈 때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움과 삶의 고된 일들,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들이 빼곡한 얇은 편지지를 조심스레 넘기며 ‘내 글쓰기는 여기서 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듯이 나도 엄마가 다시 한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데 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꾸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