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4. 때론 어리석음이 부럽습니다.
수치스러운 것, 나를 궁핍하고 괴롭게 하지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 콤플렉스, 그런 것들이 말 못 하는 고민에 속하겠지요? 예를 들어,
지독하게 가난한 남자가 사립명문대학에 입학하여 사랑에 빠집니다.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도저히 자신의 가난을 말할 수 없다든지,
3살 어린아이를 둔 미혼모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여자는 고아라 기댈 곳이 없고 남겨질 어린아이 걱정에 말 못 할 고민에 빠진다든지,
어떤 여자는 고아라고 속이고 연애 중이지만 사실은 강도죄로 복역 중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의 존재를 밝혀야 할지 고민한다든지,
등등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이런 상황 말고 사소한 것들도 있겠지요.
치과가 무서운 어린이. 이빨이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면 엄마가 치과에 데리고 갈 테니 말 못 하고 고민에 빠진다든지,
두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젊은이. 오랜 연인이 있지만 새로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품고 고민에 빠진다든지,
고양이 없이는 못 사는 애묘인, 어느 날 갑자기 지독한 고양이 알레르기가 생겨 고민에 빠지고….
이렇게 적고 보니 말 못 할 고민은 대개가 ‘사랑과 인정’에 관련된 것입니다. 뒤집어보면, 사랑과 인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말 못 할 고민에 빠질 가능성이 높겠네요. 사랑은 달콤하지만 그 매력이 우리를 옭아매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랑의 노예가 되고 사랑은 고뇌의 원천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는데, “돈이든 사랑이든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의 너무 목을 매면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괴롭다. “고 하시더군요.
저는 생각합니다. 색즉시공을 깨달아 초연한 상태가 답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까? 두근거리는 사랑, 애착, 욕망에 빠지는 것도 특권이기에, 그 고뇌도, 말 못 할 고민도 모두 한 세트로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대체 나는 가슴 두근거리고 아려 본 것이 언제였던가? 무덤덤한 날들이 이어지면 그저 그 어리석음마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글쓰기가 나를 쥐어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