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흄이 말합니다. 기후변화는 실재다.
예전에 개도국의 교육이나 보건, 인프라를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는 일을 설명하면 상대방은 '오 그렇구나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고,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로 대화가 끝나고 했습니다. 요즘은 설명이 좀 더 간단해졌어요. '기후변화 대응 관련 일을 합니다'라고 하면, '오 중요한 일 하시네요. 요즘 날씨가...'라고 대화가 진행됩니다.
사실 개도국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는 건데, 그 내용이나 방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목적은 다르지만, 사람 사는 일이 모두 얽혀 있어, '기후변화'만 떼서 뭔가를 하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왜 예전엔 '좋은 일' 이제는 '중요한 일'로 인식될까 생각해 보니, 상대방과 상관없는 또는 잘 모를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고, 상대방도 영향을 받는 기후변화 관련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기후변화'라는 것을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 자라는 거라고 생각해 봅시다. 꼬물꼬물 한 새싹이 점점 커져서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요.
과학자들이 기후변화라는 현상을 처음 발견한 것은 1896년으로, 스웨덴의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가 인류가 석탄을 태워 대기 중으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지구 온도가 서서히 올라 몇 도 상승할 거라는 예측을 발표할 때 아무도 이것을 우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50년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보니, 산업혁명 후 50여 년 만에 '기후변화'라는 것의 시초(새싹)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새싹이 어떻게 자랄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다시 50년이 지나 1950년대에 몇몇 과학자들이 이런 기후변화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예측을 보여주었고, 1970년대에 기후변화의 영향에 대한 본격적인 과학적 논의가 시작되었죠. 작은 새싹인 줄 알았던 것이 쑥쑥 자라더니 땅속에 거대한 마그마를 품고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놀란 사람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유엔이 1988년 전 세계 수천 명의 과학자들을 모아 기후변화 문제를 평가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IPCC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을 만듭니다. 정부들은 1992년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에서, 1997년에 교토에서, 2015년에 파리에서 모여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자는 협약들을 채택했습니다. 강제성이 없는 협약이었고, 미국은 화석연료 산업의 로비에 휘둘리며 가입과 탈퇴를 반복했으며, 유럽이 분발하기는 했으나 1990년부터는 중국과 인도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배출량이 급증했습니다. 2015년 이미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1도 상승해 있었습니다. 기후변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실체가 되어 있었죠.
(자료출처 https://www.climatewatchdata.org/embed/key-visualizations?visualization=5 에서 마우스 오버 하면 숨겨진 데이터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015년에 기후변화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느냐 되돌아보면,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었습니다. 2015년에 MDGs(새천년개발목표)가 끝나고 SDGs(지속가능 개발목표)가 시작되면서 '환경 관련 목표가 많이 들어갔구나' 정도였달까요? 쓰다 보니 부끄럽네요.
다시 한번 부끄럽지만, 겨우 코로나 시기가 되었을 때, 기후변화가 제 맘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의 활동영역의 확장과 지구 온도 상승이 이런 전염병에 대한 개연성을 높인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기후변화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 당시 살고 있던 중남미 국가가 기후 급변 요소 중 하나인 '엘니뇨-남방진동 변화'의 영향으로 잦은 가뭄과 고온에 시달린다는 것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후변화가 내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되어서야, '기후변화'는 제게 '실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 이 세상, 그것이 존재하는지 않는지에 대해 철학자들은 끝없이 논쟁해 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있던 없던 알던 모르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나 칸트는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추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세계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와 인식한 '현상'으로 나뉩니다. 흄과 로크는 우리의 직접적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실재가 인식될 수 있다고 봤지요.
기후변화를 대하는 우리의 (나의) 자세를 고찰하면, 기후변화라는 '실재'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는 경로가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논의한 것과 비슷합니다. 기후변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거기 있었고, 이성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이해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면서 '실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기후변화가 실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는, 뭔가 이전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그러더라, 그런 개념이 있다더라'는 수준을 넘어, '이거 어떡하지'가 되는 거죠.
경험하면서도 불안이나 현실적 이해관계에 대한 방어기제로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의 기후변화 부정론을 보면 '지구 관점에서 보면 기후변화는 언제나 있었다' 정도이지 '기후변화는 없다'는 아닌 것 같아요.
누가 기후변화는 언제나 있었다고 하면, 페름기에 수천 년 동안 시베리아 전역의 화산이 폭발해서 수조 톤의 온실가스가 나와 10도가 올랐고 그 후 천만년동안 화석이 없을 만큼 대멸종이 었었다. 인류가 산업화 이후 꺼낸 온실가스가 거의 이미 2조 톤이다. 즉, 인류가 유발하는 기후변화의 속도와 온도는 유래 없이 급진적이다, 그리고 어차피 지구가 망하는 게 아니라 인류가 망하는 거라고 반박해 주세요.
어제 남편이랑 이 얘기를 하다가 NGO에서 나오셨냐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건 아닌데, 매일매일 경험하는 기후변화의 실재성이 더 커지는 데다가, 기후변화에 대해 공부하고 일하다 보면 점점 더 생각이 명확해져요. 외부의 실재성과 내부의 실재성이 동시에 자라서,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