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럴 줄 알았다?
근현대 철학은 개인을 주체로 세웠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도록 주체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공적입니다. 하지만 주체를 강조하다 보니 나 이외의 것을 다 객체화, 대상화하는 폐해가 생겼어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물질이 가진 역동성과 에너지에 집중하자는 신유물론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너만 사람이냐? 나도 사람이다'라는 논증의 물질 확장 버전입니다.
미셸 푸코는 '살게 만들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과 정치(생명정치)'가 우리 개개인 속에 내재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근대사회 이후 인간은 자유를 가졌지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며, 우리를 둘러싼 타자와 환경도 도구로 활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비판하면서 생태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기반)가 나와 공동체와 탈성장을 강조했고, 이 두 가지 생각의 흐름은 지금도 환경운동의 큰 줄기입니다(환경 관리주의 vs 사회 생태주의).
신유물론은 이 두 가지 생각이 모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 생명정치의 범위가 인간 너머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인간 사회뿐 아니라 동물이나 환경도 '살게 만들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생명정치를 하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애완동물과 가축은 사육을 통해 살게 만들고, 유기 동물이나 야생동물은 죽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신유물론이 대두한 배경에는 근대 문명의 성공과 실패가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발전은 기후 위기, 생물 대멸종, 인수공통 전염병의 유행 등 감당하기 어려운 부작용을 불러왔습니다. 대안적인 생각이 필요해졌습니다.
신유물론의 대표 격인 프랑스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비인간 자연도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기 조절 능력을 지닌 “가이아”라고 봤습니다. 가이아에 의존하면서 사는 게 인간과 비인간 생명이니, 인류가 이들과 공생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인류세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 간의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인간과의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죠. 하지만 어떻게 비인간과 연대할 수 있을까요? 아니 애초에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신유물론에서는 시각적, 체현적, 윤리적, 정치적 encounter(만남)을 제시하는데요, 그들을 보고, 느끼고,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고 실천하며, 무생물까지 연대의 범위를 늘리자는 겁니다.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만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부터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의 자유도 인정하는 거죠. 이를 통해 인간 너머의 연대가 시작됩니다. 연대를 기반으로 지구 행성에서 공생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글로 써보면 재밌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나누는데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나왔습니다. 다만,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용어는 빼고 써야지 사람들이 읽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하 그렇죠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말 자체가 참 낯설고 딱딱합니다. 거기다가 신유물론이라는 철학적 논의라니... 아무튼.
'아우, 이제 100살 넘게 산다는데 어떡하지'라고 한 얘기에, 파라과이와 에콰도르에서 살고 있는 동료들이 말했습니다. '100살 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실감이 안 나는데? 작년만 해도 45도까지 기온이 올라서 많이 죽었어'. 빈곤과 불평등을 최우선으로 해왔던 국제개발협력이지만, 기후재앙하에서 그 빈곤과 불평등이 더욱 강화되기에, 우선순위의 범위를 넓힐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개도국을 도와주는 방식에도 환경에 대한 고려, 환경이 원래 가지고 있던 회복력을 활용하고 증진하려고 하는 고려가 강화되었습니다.
맑스가 살아 돌아와 세계대전, 그 후의 재건, 세계화(와 국제협력), 기후변화문제까지 목격한다면, '그렇게 내 거 내 거 하고 욕심을 부리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하고 할 것 같습니다. 사유재산의 기원은 약탈/울타리 치기이다, 원래 공동의 것을 내 것으로 선언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하는 맑스이기에, '공동'의 울타리를 인간을 넘어 다른 생명과 자연에까지 확대하는데 앞장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