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7. 세상 여유로웠던 명절
올초 구정의 일입니다.
국제기구의 연휴는 종교별로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어요. 기독교는 크리스마스 하루, 이슬람 휴일 하루, 부처님 오신 날 하루, 가톨릭의 이스터 하루 등등… 한국의 명절에 대해서도 큰 배려는 하지 않아서, 이번 구정 연휴는 단 하루. 업무를 후다닥 마무리하고 간신히 표를 구한 새벽 KTX에 몸을 실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해 하루를 호텔에서 지내며 재택근무를 하고, 다음날 시댁에 도착했어요. 이층 주택의 이층에 있는 시댁에는 너른 마당이 있습니다. 저는 이층에 있는 이 마당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1층도 아닌데 마당이 있어서 바로 바깥공기를 쐴 수 있다니! 구옥의 이런 공간에는 땅값이 싸던 시절의 여유로움이 배어 있어요. 요즘의 기준으로 보자면 호화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서 보면 고만고만한 2층 3층 마당 집들이 경사진 언덕에 앉아있어서 모든 집이 전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집이 서로의 마당을 훤히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붕들이 물결치듯 겹쳐져서, 콘크리트로 된 호수를 보고 있는 듯해요.
도착해 보니 시아버지는 장을 보러 가셨고 시어머니는 전을 부칠 준비를 하시다가 낮잠에 빠지셨어요. 나와 남편은 한우며, 딸기, 사과를 거실에 부려놓고 마당에 나와 평상에 누웠습니다. 평상 위 약간 우그러진 장판에 얇게 물이 고인 줄도 모르고 앉았다가 차가워 벌떡 일어납니다. 수건을 찾아와 남편이 물기를 좌우로 밀쳐냅니다. 한 귀퉁이 물기만 닦아내고 바짝 몸을 붙이고 누웠는데, 눕자마자 남편 안경 위에 물방울 왕건이가 투둑 떨어졌어요. 아잇 이게 뭐야 하고 후다닥 일어나 올려다보니, 마당으로 난 처마 끝에 물방울이 맺히고 있습니다. 남편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고 다시 누웠습니다. 1분에 한 번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우리는 고요한 몇 분을 보냈어요.
그리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잠든 어머니를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뜨끈한 방에 누워 있다 보니 잠이 솔솔 옵니다. 느긋하게 있다 보니 아버님이 오셔서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 저녁을 차려 먹고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구정에 시댁에 내려갔는데,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놀라움과 감사함에 사무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