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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 Apr 28. 2024

Q99. 나의 일 년을 담아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면

영화제목은 환승연애, 습한 집, 글쓰는 귀신 들린 여자

나의 지난 1년, 지난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기간에 대해 영화를 만든다면, 제목은 "환승연애"로 하겠습니다.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해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환승) 이직을 했고, 글쓰기가 '평생 하고는 싶은데 참 안 되는 것'에서 '매일매일 하는 것', '없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나를 얽매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전 직장에 대해 '그래도 참 좋은 곳이었다. 나를 많이 키워주었다'라고 고마워하며 헤어졌고, 새로운 곳에서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하고 기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이제 매일 함께 지내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환승연애라는 제목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너무 '연애' 얘기가 없는 관계로 '환승연애'라는 제목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낚는 행위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다음 대안으로 제안하는 제목은 '습한 집'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데, 이 질문이 머릿속의 상상력 스위치를 켜버린 것 같아요. 자꾸 아무 생각이 납니다.)


작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청계산 밑의 빌라에 살았는데, 계곡 바로 옆이기도 하고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그 여름 집이 정말 습했습니다. 벽지가 울고 문틀이 떨어질 만큼 축축했어요. 에어컨을 살까 말까 망설이며 여름 절반을 버텼는데, 우리나라 정말 동남아 되었구나 하고 실감했지요. 영화는 그 집에서 살아가던 몇 개월을 비춥니다.


2월 말에 여행가방을 들고 주말에 도착했는데, 도시가스가 안 들어와서 며칠을 오들오들 떨며 당근에서 공짜로 얻은 100만 원짜리(라고 하는) 소파에서 잠든 모습으로 시작해, 저녁 무렵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청계산 입구에 오르는 장면, 산 쪽으로 난 창문에 붙어 앉아서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봄비가 가로등에 비치는 것을 구경하는 남편과 고양이의 모습, 옥상에 기르던 상추를 따다 먹는 우리 부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쓰레기 불법 투기"하지 말라며 나오던 경고방송.... 그리고 한여름 비가 오던 날 이사를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부부는 빌라 현관 앞에서 "그래도 몇 개월 좋은 곳에서 잘 지냈다"라고 말하고 1분 정도 앉아서 집 앞의 절을 바라보다가 떠나요. 영화 "습한 집" 끝.


이렇게 뇌 고삐 풀린 글을 쓰다 보니 우리네 인생이 참 영화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마지막 영화제목은 "글 쓰는 귀신이 붙은 여자"입니다. 첫 장면은 신나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2시에 귀가한 여자 주인공이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글을 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글만 쓰는 게 아니라 새벽 5시부터 요가를 합니다. 섬뜩하지요. 영화는 여자의 새벽과 여자의 밤만을 비춥니다. 이 여자가 낮에는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안 나와요. 정장을 입고 나가기도 하고, 며칠씩 집에 있기도 하고, 쫄바지를 입고 나가기도 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의 새벽과 밤은 글쓰기로 채워집니다.


식탁에서, 책상 앞에서 글을 쓰는 여자의 뒷모습,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 창백한 컴퓨터 화면의 불빛이 화면을 채웁니다. 영화는 창밖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계절이 흐르는 것을 보여주고, 여자의 표정변화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장난스럽던 여자의 표정이, 어느덧  혼란스러워지고, 점점 진지하고 처연해지다가, 결심한 듯한 편안한 표정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글을 완성한 새벽과 밤의 여자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납니다. 마지막 장면은, 고양이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니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에요.


하하 무슨 쓸데없는 소리람요.


아무튼 지난 1년을 영화처럼 생각하는 것, 의외로 무척 재밌네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꼭 한번 해보시길 바라요.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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