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병폐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내가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로 정리해 본다.
첫째는 우리나라가 전근대적 사회문화제도를 쇄신하지 못하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중국은 청왕조에 미련이 없었고, 일본은 입헌군주제라는 완충지대를 두었지만, 우리나라는 식민지 이후에 국제정세에 의해 주어진 독립을 맞으면서, "왕의 목을 베지 않고" 공화제로 이행했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형식은 갖추었으되, 실질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절대군주와 귀족(신하), 평범한 국민이라는 생각의 틀이 여전하다. (그래서 국민을 개돼지라고 부르나?)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둘러싼 논의도 민주주의 (국민의 뜻이 어떻게 더 잘 반영될 것인가) 관점이 아니라, 왕과 신하의 파워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었던 것 같다. (헌법은 내각책임제로 기초되었으나, 양평대군의 자손을 자처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고집했다.)
전근대적 사회문화제도의 흔적은 군역/병역비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본래 우리나라는 병농일치제 국가로, 전사계급이었던 서양 귀족들과 다르게 우리 양반들은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조선 말기에 호패법을 도입하여 양반들에게 병역과 관련된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도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군역(in 삼정의 문란)의 부담이 커지면서(원래 소출의 20%였다가 균역법으로 10%로 개선되었으나, 이때부터 신생아나 죽은 사람, 도망친 사람에 대한 군역을 산 사람, 남은 사람에게 징수함), 돈을 주고 공명첩을 사거나, 자진하여 노비가 되거나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향교에 등록하여 군역을 피하는 평민들도 많았다.(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고, 양반들은 서원을 세움). 양반이 40%가 된 조선후기에는 20-30%의 평민들이 과중한 군역에 시달렸다. 현대의 군역(거의 공짜로 청년들이 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것)도 조선시대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현대의 병역비리는 군역의 의무에 합당하는 보상(명예 or 돈)이 주어지지 않는 전근대적 군역제도를 개선하지 않고 유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둘째는 식민지(ft. 세계대전), 건국과 한국전쟁(ft. 냉전) 등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인센티브 체계 및 사회적 쟁점이 뒤틀렸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국제정세에 의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독립 이후, 우리 사회의 대립키워드는 "애국 vs 매국(친일)"에서 "우(미국) vs 좌(소련)"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외부적으로는 1)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냉전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고, 내부적으로는 2) 친일 세력이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전환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남쪽에는 미군정이 들어서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미군정은 "별도의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현재의 공무원들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으로, "친일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첫 시그널이 주어졌다. 1948년 남한단독이지만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설립된 반민특위는 6.25 전쟁 직전에 (친일파가 많았던) 경찰에 습격당하여 해체된다. 이어지는 한국전쟁으로 친일파 청산에 대한 동력이 결정적으로 상실되었다. 식민지를 오래 겪을수록 매국적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최소한의 자정작용(독립군을 사살, 그 가족을 탄압 등의 악질적인 친일행위를 걸러내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인센티브 체계가 만들어졌다.
한편, 신탁통치(UN)를 둘러싼 입장차이(남로당 찬탁, 한민당 반탁)는 남로당이 소련연방 즉시가입을 주장한다는 가짜뉴스(뉴욕타임스)에 힘입어 좌우 대립으로 사회적 쟁점을 바꾸는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은 이 프레임을 강화했다. 현재 한국의 좌우는 역사적 질곡을 반영한 무늬를 가지고 있다. 우파의 경우 강경파(Hawks)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좌파의 경우 온건파(Doves)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형태이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 법치주의, 권력분립 등 민주주의의 가치가 사회적 쟁점의 핵심에 있지 않은 듯하다. 좌파가 우파보다는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듯 하지만, 자칭 민주주의 동맹의 핵심인 미국을 지지하는 것은 우파이다(물론 미국은 민주주의보다는 자본주의 가치의 수호자이지만). 우파가 전쟁의 트라우마를 활용하여 다른 모든 사회적 쟁점들을 후순위로 밀어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 사회는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두게 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단이 가족이나 다른 가치가 아니라 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사는 총 4권인데, 목차를 보니 2,3,4권을 읽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 기대했던 연대순으로 쓴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사에 나의 무지를 재발견하고, 현대사의 핵심쟁점을 고민해 보게 한 책으로,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