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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기간의 끝

새로운 시작

by Jee

유미는 미국에 도착한 후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는 방콕으로 향했다. 주로 빈둥빈둥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남자친구가 아는 작은 엔지오에서 필요한 일을 도왔다. 환경 교육이라든지, 기초적인 글쓰기 교육 같은 것이었다.


남자친구가 일하러 나가고 고양이와 단둘이 아파트에 남으면, 고양이와 나란히 누워 햇빛을 쬐었다. 몸이 따끈따끈해지면 고양이는 실신하듯 잠이 들었다. 유미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글을 썼다. 한 손은 고양이 등에 올리고 고르릉 거리는 진동을 느꼈다. 그러고 있자면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찐득하고 뜨거운 날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 유미는 태국의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중국 서쪽 산맥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동남아 국가들을 관통하여 베트남에서 바다로 빠지는 길고 긴 메콩강 주변의 마을들이었다.


누런 강은 넓었고 양 옆에 야트막한 언덕과 작은 마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들은 나무와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강가는 흰색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백로들, 나무 위에서 장난스럽게 뛰어노는 원숭이들, 그리고 강가에서 기어 다니는 작은 뱀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유미는 계속 글을 썼다. 갈라파고스에 대해서, 단순한 삶에 대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삶에 대해서. 유미가 진짜 싫증이 났던 건 마음이 들끓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백하는 글들이었다.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욕망을 모조리 꺼내어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글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욕망을 거세당하는 느낌이 들만큼, 철저히 발라냈다.


“대단히 많은 돈을 벌기를 욕망하지 않아. 돈을 많이 벌 때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잖아.”


“누구나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아. 그래봤자 피곤할 뿐인걸. “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지도 않아. 내 안에 뭔가 써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는걸.”


하나하나 거세해 나가면서, 유미는 자신이 투명하게 비워지고 있는 동시에, 뭔가에 접근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느 날, 한 마을에 머물 때였다. 유미는 나무로 된 기둥과 가파른 지붕, 대나무로 된 벽과 바닥이 있는 전통집에 머물렀다. 범람을 대비해서 1층은 필로티로 비워둔 2층집이었다. 아침해는 깎아낸 나무의 아름다운 곡선에 무늬를 만들었다.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집이었다. 창밖에는 멀지 않은 곳의 강과 나룻배들이 보였다.


유미는 몇 달 전까지 머무르던 갈라파고스의 이층 집을 떠올렸다. 창을 열면 태평양 바다가 보였고 이곳과 다른 동물들이 살고 있는 곳. 그리고 클레어, 클레어와 함께하던 단순한 시간들은 유미에게 주어진 소중한 유예기간이었다.


책의 초고를 다 쓰던 어느 날, 유미는 동네의 바에 나갔다. 석양이 보이는 카페의 이층은 이미 꽤 붐비고 있었다. 메콩강의 석양은 태평양의 석양보다 부드럽고 은은한 핑크색으로 하늘 한 귀퉁이를 물들였다. 강어귀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그물 던지는 시늉을 하고 돈을 받는 어부가 그림에 그린 듯 서 있었다.


유미는 라오스의 IPA 맥주를 주문했다. 라오스 국경에서 가까워서 바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맥주였다. 누군가가 이 쪽을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짧고 호리호리한 여자가 건너편 바에 앉아 있었다. 클레어였다.


유미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쳐다보니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거기 클레어가 서 있었다.


“클레어!”


유미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클레어를 꼭 껴안았다. 전보다 더 야윈듯한 몸이 품에 꼭 안겼다.


“잘 지냈어?”


클레어는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캐주얼하게 물었다.


유미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미국에서 헤어진 후 태국으로 와서 침잠했던 것, 남자친구와의 재회, 갈라파고스에서의 일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얘기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줄곧 듣고 있었다.


“그런데 클레어, 태국엔 언제 온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온 거야?”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지만, 태국에 있는 건 알고 있었지.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난 건 정말 신기하네.”


클레어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유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뿐이었다.


“진짜 신기하지. 네가 얘기했던 그 단순한 삶 말이야. 그걸 시험해보고 싶어서, 재단을 만들었어. 네가 아이디어를 준 거니까, 같이 하자고 말하려고 했지. 이제 곧 시작할 거거든.”


유미는 저녁마다 클레어와 함께 나누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버리지 않아도 행복한 삶, 그런 삶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얘기했던가. “Less Life 말이지 “


“그래 그거, 미국과 태국에서 일단 시작해 보자.”


클레어는 맥주병을 짠 하고 부딪혀왔다. 유미는 얼떨떨한 동시에 신이 나서 소리 내어 웃었다.




바를 나와 유미와 클레어는 유미가 지내고 있는 이층 집으로 향했다. 밤의 풀향기와 바람에 실려오는 물비린내가 두 사람을 따라왔다.


“여기야.”


집 앞에 멈추어 서서 유미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너를 초대할게. 후후 진짜 내 집은 아니지만. “


클레어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유미는 이제 유예기간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유미는 문을 열고 클레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새로운 국면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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