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삶
클레어는 낮에 위성전화를 했고, 회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음날 연락이 왔지만, 그런 배는 없다는 거였다. 유미가 타고 온 크루즈 프로그램은 어제 끝났으니 파악이 안 되는 건지도 몰랐다. 한 번 더 알아봐 달라고 하고 하루를 더 기다렸다.
그동안 유미는 클레어와 함께 거실에서 책을 읽고, 내키면 바다사자들과 수영을 했다. 바다사자들은 유미가 수영하면 ‘누구시냐’는 듯이 다가왔다. 눈을 마주칠 것 같은 거리까지 스칠 듯이 미끄러져 와 빙그르르 몸을 뒤집으며 지나쳐갔다. 유미는 바다사자가 일으키는 물길을 느끼면서, 알 수 없는 커다란 손길이 맨살을 만지는 듯한 관능적인 감각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주말이 오고 휴가기간이 끝났다. 유미는 위성전화를 빌려 회사에 전화를 해 사정을 알렸다. 배가 구해지는 데로 곧 돌아가겠다고. 고양이 돌봐주는 분이 일주일 더 올 수 있도록 연락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유미가 이런저런 통화를 하기 전에, 클레어는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제 배를 좀 일찍 부를 수도 있어요. 비용은 좀 들겠지만 “ 일주일 정도… 더 휴가를 즐긴다고 생각하지 뭐. 유미는 말했다. “괜찮으시면, 일주일 후에 들어오는 클레어의 배를 타고 나갈게요. 이렇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
짚 앞에 기거하는 부비새 수컷은 지치지도 않고 발을 들고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춤을 추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날갯짓을 했다. 그러고 나면 작은 깃털이나 나뭇가지를 들고 와 암컷 앞에 내려놓았다. 나뭇가지를 물고 오는 부비새의 비장한 표정은 뒤뚱거리는 발걸음과 뒷짐 진 날개 때문에 더욱 귀엽게 보였다. 운이 좋은 날은 암컷과 함께 춤추는 수컷을 볼 수 있었다.
집 앞 바위에 붙어 있는 이구아나는 단단하고 주름진 앞발을 딛고 유미를 쳐다보곤 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건 아니었지만 유미는 이구아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 왔을 때 싱긋 웃어준, 그 이구아나였다.
“안녕?”
유미는 1미터쯤 떨어진 바위에 앉아서 이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클레어는 누구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
클레어는 아주 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노쇠한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깨끗하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을 떠올리게 했다. 말수가 없고 식사시간을 정시에 챙기고 남는 시간에는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2층 자신의 방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 집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넓어서, 주의한다면 서로의 존재를 최소한으로 느끼며 지낼 수 있었다. 유미는 클레어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루에 두 번쯤 식사 사이의 애매한 시간에 주방을 사용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었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간식을 챙겨 올라와 해 질 녘부터는 글을 썼다.
종이에 손으로 쓰는 글은 느렸다. 뭘 써야 할지는 몰랐지만, 이 섬에는 해가 지면 읽거나 쓰거나 상상하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낮에 본 이구아나에 대해 쓰기도 했고, 부비새의 춤에 대해 쓰고 서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젯밤에 꾼 꿈에 대해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가 새끼 강아지를 질식시켜 죽이는 꿈이 생각나면, 겁에 질린 개처럼 꼬리를 말고 글을 썼다. ‘예전부터 엄마는 무엇이든 죽일 수 있었지. 그게 강아지든, 주위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죽인 것은 강아지뿐이었지만, 가장 죽이고 싶었던 건 자기 자신이었고.‘ 유미는 엄마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쓸 때마다 불길했다. ’ 내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건 잘 몰라서지만, 엄마가 강아지를 죽인 건 다 알고서잖아.‘
평화로운 며칠이 더 흘렀다. 유미에게는 꿈에 그린 듯한 날들이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발을 동동 그리며 할 필요도 없다. 충분히 자고, 잘 먹고, 수영을 즐기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돈 걱정 없이, 미래나 커리어에 대한 걱정도 없이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제 곧 떠나야 한다. 오늘 배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어서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어 1층으로 내려갔다. 웬일인지 클레어가 거실에 서 있었다. 위성전화를 한 손에 들고,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전염병 때문에 공항도 폐쇄되고 통행도 금지될 거래요.”
클레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