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대신 코카차
유미는 창문 덮개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잠을 깼다. 일어나야지 생각하면서도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안개에 잠긴 것처럼 잠으로 꽉 차 있다. 유미는 다시 스르륵 잠으로 빠져 들었다. 아니,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어중간 상태에서 주춤거렸다.
“깍깍 “
새소리에 다시 잠에서 현실로 의식이 건너왔다. ‘일어나야지’ 덮고 있던 이불이 복잡한 모양으로 돌돌 말려 있었다. 몇 번을 뒤척이며 말린 곳을 풀어내려고 하는데, 이불 끝이 몸에 깔려 있는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풀어서 주머니에 넣어놓은 목걸이가 꼬여버린 것처럼 이불이 유미를 감고 놓아주지 않는다. 유미는 ‘어휴’하며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꿈에서 유미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강아지가 또 새끼를 낳아서 골치가 아파. 논이며 밭이며 온 산에 돌아다닐 텐데’ 꿈에서 유미는 가만히 엄마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새끼들을 봉지에 넣어서 버렸어.’ 유미는 귀를 의심했다. ‘봉지에 넣어서?’ ‘그래. 까만 봉지에 넣어서 꼭 짜매 놓으면….’
유미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침대를 박차고 나와 창문을 초록색 창틀을 열고, 나무로 된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태평양 바다가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태양은 수평선에서 얼마 떠오르지 못했다. 나무 그늘 밑에는 푸른발부비새 한쌍이 발을 한 짝씩 들어 올리며 뒤뚱뒤뚱 춤을 추고 있었다.
1층에 내려가니 클레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유미는 ”굿모닝“하고는 ”뭘 도와줄까요? “하고 물었다. 클레어는 “다 됐어요. 와서 앉아요.”하며 싱긋 웃었다. 버터와 빵, 뜨거운 차. 프라이드 에그의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빵에 버터를 발라 씹고 차를 마셨다. “저는 커피를 안 마셔서. 차도 괜찮아요? 코카잎으로 만든 거예요. “
서너 개의 코카잎에서 연두색의 차가 우러난다. 약간 떫고 쓴 맛이 버터와 프라이드 에그와 잘 어울렸다. “맛있어요.” 유미는 말했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미, 여긴 인터넷이 없어요. 전 위성전화로 외부와 소통합니다. 2주에 한 번씩 배가 와서 물건을 받거나 제가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요. 마침 화요일에 배에서 물건을 받았으니, 제 배는 열흘은 기다려야 들어올 거예요. 크루즈 관련해서 생각나는 건 있어요? “
유미는 흠, 하는 한숨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 속에서 정보를 끌어올리려고 하면 뭔가가 완강하게 막고 있는 듯하다. 골똘히 책장 어딘가를 노려보다가, 유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제가 낮에 위성전화로 운항하고 있는 배 중에 승객을 놓친 배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할게요. “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대안도 떠오르지 않는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클레어는 명랑하게 반복했다.
땀에 절은 반바지와 티셔츠 대신 클레어가 준 헐렁한 베이지색 긴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언젠가 옛날 영화에서 본 히피나 수행자들이 입는 옷처럼 부드럽고 짜임새가 느슨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옆 책상에는 종이와 펜이 놓여있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핸드폰은 꺼둔 상태였다. 누군가가 전화가 올지도 몰랐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다. 여행사와의 연락은 모두 웹사이트로 진행하고 이메일로 확인을 받았다. 회사에서도 모두 왓쯔앱이나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전에 열어본 적 있는 이메일 페이지가 혹시 보일까 했지만, 아예 빈 화면이 나왔다. 핸드폰이 없으니 더욱 머리가 멍한 건가. 유미는 단념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클레어, 이 주위는 안전해요? 산책하기에?”
거실에서 책을 보던 클레어는 “그럼요. 조금만 내려가면 해변도 있어요.” 하고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길은 어제 유미가 크루즈에서 내려 절벽으로 올라갔던 경로와 같았다. 바위사이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 골판지를 겹쳐놓은 것처럼 지층이 뚜렷한 갈색 바위가 나오고, 그 사이로 작은 해변이 펼쳐진다. 해변에는 바다사자들이 아침 햇살을 쬐며 드러누워 있었다. 유미가 다가가자 잠시 고개를 쳐들었다가 다시 모래 위에 철퍼덕 떨구었다. 유미는 해변을 지나쳐 배가 접안할 수 있는 데크까지 걸었다. 멀리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봐도, 배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자꾸 노려보니까 눈앞에서 뭔가가 아른아른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미는 고개를 휙휙 저어 눈앞의 아지랑이를 떨어내고,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