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버리고 변형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섬
한국으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 휴가지는 섬이었으면 했다. 인터넷이 안 터지는 섬, 누구의 전화도 받을 수 없고, 그저 깊은 바다만 있는 곳, 그런 섬이 어딜까 고심했다.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가면, 관리자로써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선다. 더 지루하고, 더 무가치한 하루하루를 예상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앞으로 십수 년간 이어질 그날들을 생각하니 갈 곳도 없이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행이라도 떠나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갈라파고스 섬에 도착했다. 황량한 섬의 경사면에는 자이언트 선인장이 꽤 많이 서 있었다.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면서 줄기와 엽록체가 합체하여 두툼한 잎이 되고, 정작 잎이었던 것은 가시가 된 것이 선인장이다. 그런데 갈라파고스 섬에는 초식 동물인 코끼리거북이와 육지 이구아나가 선인장까지 먹어치웠다. 그래서 갈라파고스 선인장은 단단한 나무둥치를 키워 대항했다. 전봇대처럼 멀쑥한 자이언트 선인장은 유미가 다른 영토에 왔음을 알려주는 상징 같았다. 여기에선 너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변형시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섬 전체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한참 자이언트 선인장을 구경하다 보니 버스는 섬의 반대편으로 넘어가 크루즈 항구에 도착했다. 공항 쪽은 어린잎들이 나오자마자 까맣게 태워버릴 만큼 건조하고 뜨거웠는데, 섬의 반대편은 으스스하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미는 자신의 캐리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며 바다, 사람들, 크루즈, 선인장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서른 명쯤이 정원일듯한, 크지 않은 하얀 크루즈가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는 다양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벌레들과 함께 인터넷 없이 지내는 것이 최고의 휴양이었다는 젊은 미국 여자들, 인근국에서 큰 마음먹고 갈라파고스 섬 구경 온 가족들, 오랫동안 즐긴 다이빙에 그을린 일본인 커플…. 혼자 온 사람은 유미뿐이었다. 선실이 모두 2인실이었으니, 그럴만했다. 유미는 2인분을 결재하고 급히 합류한 거였으니까. 둘 또는 그룹으로 모여있는 승객들을 보니 유미는 착잡해졌다. 그러게 이런 곳은 혼자 오는 게 아닌데,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몇 년 전 그리스 산토리니를 혼자 여행하면서 다시는 이런(다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는) 곳에 혼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급히 예약하느라 잊은 것이다. 유미는 넓지도 않은 객실이지만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어디냐고 합리화를 했다.
크루즈는 이런저런 섬들에 정박했고, 승객들은 내려서 섬들을 트레킹 하며 이구아나, 바다사자, 부비새들을 만났다. 가이드들은 동물들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정작 가까이 다가오는 건 인간의 악랄함을 모르는 동물들이었다. 적도를 역류하는 차가운 훔볼트 해류에 풍덩한 다이빙에서는 코앞까지 다가와 스칠 듯이 헤엄쳐가는 바다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바다사자는 눈을 마주치며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인간은,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는 신기한 (또는 모자란) 동물 z 정도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크루즈는 밤이 되기 전에 승객들을 섬에서 불러들였고,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의 캐빈(선실)에서 씻고 잠이 들었다. 유미는 혼자가 된 선실에서 그날 본 것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렸다. 부비새가 얼마나 뒤뚱거렸는지, 이구아나가 어떤 모양 새였다든지, 그런 장면들을 실속 없이 회고하며 에콰도르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가 잠이 들고, 아침을 먹으러 가는 옆 선실의 발소리에 다시 아침이 시작되었다. 혼자 있는 게 지겨워서 얼른 지나갔으면 싶다가도, 이 여행이 끝나면 가야 할 꽉 짜인 한국의 조직을 떠올리며 시간이 좀 더 더디게 흐르길 바랐다.
4일째 아침, 유미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새소리? 바다 한가운데 새소리? 보통 아침마다 들리는 소리는 늘 파도가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였으니까. 크루즈는 어느덧 섬 근처에 정박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난 후, 오늘은 저 섬에 내릴 모양이다. 유미는 왠지 머릿속에 구름이 낀 것처럼 멍했다. 오늘은 어떤 섬에 내리기로 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매사 계획하고 박스에 집어넣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유미인데… 내일이면 휴가도 끝나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그다음은 한국으로…. ‘아니 어른 아니냐, 스스로 선택한 삶에 성실해라’고 호통치는 내면의 자아가 있었지만,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선 무력할 뿐이었다.
섬이 꽤 커서 크루즈가 접안할 데크도 있었다. 승객들은 내려 좁은 길을 따라 일렬로 걸었다. 중간에 만난 연 노란 육지 이구아나는 심지어 싱긋 웃고 있었다. 이구아나는 감정표현에 서투르다. 싱긋 웃는다니, 당황스러웠다. 유미는 머리를 흔들며, 전날 먹은 술을 게워내듯이 꿀렁꿀렁한 용암의 기억이 선명한 해안바위들을 감상하며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높고 너른 바위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은 붉은 관엽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다 쪽에서는 이름은 모르지만 힘이 센 새들이 느리고 높게 날았고, 이구아나는 여전히 싱긋 웃고 있었다. 바다사자는 무슨 볼일이 있어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갈 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고 분주했지만, 혼자온 유미는 낮은 바위 사이에 앉아 기다렸다. 구름이 가득한데도 적도의 햇살은 뜨거웠다. 미처 가리지 못한 목덜미가 뜨끈뜨끈하다. 밤이 되면 통증으로 되갚아 줄 햇살을 오롯이 받아내며, 유미는 깜빡 잠이 들었다.
유미가 눈을 떴을 때 크루즈는 사라지고 없었다. 가이드도, 승객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빡빡한 눈을 끔뻑거리며, 유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이 섬은 꽤 걸을 수 있을 만큼 큰 섬이긴 하지만, 산타 이사벨라나 산타 크루즈처럼 관광지화된 섬은 아니었다. 갈라파고스 군도를 만들어낸 화산활동이 어느 날 변덕을 부려 태평양 중간 어디쯤 만들어놓은 섬이겠지. 그래도 관광객을 내려주었을 만한 섬이니, 곧 다른 크루즈가 들어오겠지, 유미는 생각했다.
문제는 해가 곧 지려고 한다는 거였다. 갈라파고스는 적도에 위치하지만 차가운 바닷물이 역류하기 때문에 바닷물이 차갑고, 덩달아 밤의 공기도 차가워진다. 물론 한국의 겨울처럼 추운 건 아니지만 밤에 노숙을 하기에는 여전히 춥다. 더 큰 문제는 섬에 살고 있는 원주-생명체들, 주인들이었다. 바다사자는 해변의 보드라운 모래 위를 선호하는 것 같았지만, 이구아나들은 깨어나자마자 햇빛을 직통으로 받을 수 있는 고원의 바위를 좋아하는 듯하다. 유미는 밤에 이구아나와 바다사자가 뭘 하는지 몰랐다. 어두워진 후에 그들을 구분해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안테나가 뜨는지 시험해 보지만 무용했다. 하긴, 안테나가 뜬다 한들,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떤 배에 연락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망설이는 사이, 바다 위로 일몰이 시작되었다. 해가 질 때쯤 크루즈로 복귀해야 했던 지난 며칠간은 일몰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바다 위로 커다란 해가 둥실, 머리통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다란 해가 걸쳤고, 바다는 차분히, 한입 한입 뜨거운 태양을 삼켜냈다. 크림브륄레를 닮은, 에그타르트를 닮은 황금빛 석양이 아니라, 가득 낀 구름을 검게 만들어버리고 혼자서만 붉게 빛나는 검붉은 석양. 무대의 끝을 알리는 검은 벨뱃커튼처럼 달군 쇠처럼 발간 태양 위로 검은 구름이 주름졌다.
“이런 건 본 적 없는데”
유미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태양은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빠르게 바닷속으로 침몰했고, 바다는 맛있다는 듯 태양을 삼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수평선 너머를 붉은 핏빛으로 물들였다. 바통 터치하듯 달이 떠오르자, 달빛에 비친 풍경들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 잠에 든 것 같았다. 유미는 바위 사이 편편한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아직 남아있는 바위의 온기에 바짝 몸을 갖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