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섬의 유일한 거주민이었다.
보름달은 검은 바다 위에 은색 빛의 길을 만들었다. 달이 점점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바다는 다시 어둠 속에 잠겨갔지만, 유미의 눈도 어둠에 조금 익숙해졌다. 지금 있는 곳은 산 위의 절벽이었다. 아구아나들은 잠든 것 같지만 다른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를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동물들일수도 있고, 풀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일 수도 있었지만, 유미는 바짝바짝 신경이 곤두섰다. 산 아래로 내려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어차피 해변에는 바다사자들이 득시글할 테다. 유미는 집에 두고 온 고양이의 규칙적인 가르릉소리와 체온이 절실하게 그리워졌다.
‘내일 다른 크루즈 배가 들어온다면 관광객들이 이 절벽 위에 올라오겠지.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배에서 보이려고 해도 높은 곳이 좋을 것 같다’
엉덩이가 아파 고쳐 앉으며 유미는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달은 천천히 전진을 계속해 어느덧 머리 위로 떠올라 있었다. 어두운 전구를 켠 것처럼 주변의 형상들이 흐릿하게 떠올라왔다. 유미는 바위들의 형태를 더듬으며 주위를 둘러보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사람이 사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매끈하고 단단한 불빛이었다
‘이 섬이 생각보다 더 큰 섬이었던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몰랐다. 어제 갔던 산타 크루즈 섬은 사람들로 빽빽한 관광지였으니까, 오늘 온 이 섬도 그런 지역이 따로 있을지 모른다. 불빛은 이 절벽-평원의 반대쪽 끝에 있는 것 같았다. ‘몇 십 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 차가운 돌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유미는 불빛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위틈에 발이 끼지 않게 주의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달빛이 유미를 따라왔다. 아주 미세한 오르막을 따라 오르다 보니 낮에 싱긋 웃는 이구아나를 만났던 산 아래 골짜기가 어느새 저 멀리 아래 보였다. 꽤 큰 2층짜리 식민지 풍 건물이 그 아래에 있었다. 분명 올라올 땐 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이곳의 지형을 잘 모르니까 못 본 거겠지. 유미는 생각했다. 더 깊이 생각하기엔 피곤이 밀려왔다. 아무려야 야외에서 밤을 새우는 것보다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을 테다. 집도 꽤 번듯해 보였다. 이런 집에 강도들이 살고 있지는 않겠지.
“똑똑똑”
쇠로 된 둥근 문고리를 두드리자 생각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났다. 문 너머는 고요하다. 기분 탓인지 문을 두드리기 전보다 더 고요해진 것 같은, 기척을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어 2층을 보니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뭔가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잘 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 유미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disculpe…)”
이번에는 자박자박 누군가가 2층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잠시 문 앞에 멈추었다가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집주인은 선이 가늘고 키가 큰 여자다. 알록달록한 망토와 헐렁한 바지를 걸친 그녀는 무슨 볼일이냐는 듯이 유미를 바라보았다. 유미는 서툰 스페인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길을 잃었어요. (Lo siento, estoy perdido)”
“들어오세요. (Venga)”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더 이상 묻지 않고 옆으로 비키며 길을 내주었다.
집 안은 밖에서 본 인상과 똑같이 대칭적이고 단순한 식민지 양식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널따란 1층 대부분이 거실이고,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이 있었다. 현관문 양쪽의 작은 창들은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계단 뒤로는 벽난로에 장작이 타고 있었다. 벽은 높은 책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유미는 사정을 좀 더 설명하고 싶었지만 서툰 스페인어가 걸림돌이었다. “바르코(배)…” 하며 입을 열었는데 더 이상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배에서 아침을 거르고 지금까지 공복이었다.
집주인 여자는 싱긋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크루즈배를 놓쳤나요? (Did you miss the cruise boat?)”
“맞아요! 오늘 밤 어떡하지 진짜 막막했는데, 들여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Yes! I was totally lost tonight, thanks for letting me in)“
집주인 여자는 자신을 클레어라고 소개하며 “종종 그런 분들이 있어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녁시간이라 식사 중이었는데, 같이 할래요?”
유미는 클레어와 식탁에 앉았다. 저녁은 감자를 넣고 끓인 닭고기 수프와 폭신한 빵, 찐 야채로 만든 샐러드였다. 유미는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재료의 맛이 살아있다고 감탄했다. 클레어는 음식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차례 음식을 배에 털어 넣고 나니 유미는 문득 머쓱해졌다. 그리고 이런 민가가 근처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클레어, 저녁 식사 정말 맛있었어요. 괜찮다면 오늘 하루만 여기서 지낼 수 있을까요?”
“그래요. 보다시피 여긴 저 말고는 아무도 없고 이층에 여분의 방이 있으니까요. 크루즈 배에 연락은 했어요? “
“아뇨. 사실 전화번호가 있는 예약증을 안 가지고 왔어요.”
“여행사 이름이나 배 이름도 기억이 안 나요?”
유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웬일인지 머릿속이 깨끗했다.
“그거 참 곤란하네요. 여긴 원래 크루즈 정박지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가끔 그걸 잘 모르고 들리는 배들이 있어요. 언제 다른 배가 또 우연히 들릴지 예측할 수 없어요. “
유미는 깜짝 놀랐다. ”여기가 크루즈 정박지가 아니라고요? “
“이 섬 전체가 제 사유지예요. 인간으로서는 제가 유일한 거주민이죠.”
유미는 어떻게 갈라파고스 같은 문화유산이 사유지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 유미를 꿰뚫어 보듯 클레어는 말했다.
“맞아요. 여기선 많은 돈이 있으면 거의 모든 게 가능하죠. “
식사가 끝나고 클레어는 유미를 이층 침실로 안내해 주었다. 더블침대와 책상. 화장실이 딸린 깔끔한 방이었다. ”내 침실은 건너편에 있어요. 오늘은 일단 푹 쉬어요. 크루즈에 어떻게 연락할지는 내일 생각해 보죠. “
유미는 새삼 고마워져 한국식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