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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마음을 들끓게 하지 못했다

20년을 했는데도

by Jee


대학 졸업을 앞두고 유미는 공기업에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뭔가를 파는 곳이 아닐 것(비영리)’이라는 기준으로 지원처를 골랐는데, 두 번째로 지원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공기업이었다. 유미가 알기로는 비영리 중의 비영리였고,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가난을 전 세계에서 퇴치한다는 무모한 목표가 마음에 들었다. 면접을 보러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회사 건물은 우리나라 현대건축 1세대인 김수근이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었는데 전면에는 4층짜리 건물을 훌쩍 뛰어넘는 키 큰 회화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면접을 보던 3월 말 봄바람에 회화나무는 후드득 이파리를 떨구며 유미를 맞아주었다.


유미는 그때까지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었다. 대학에서 국제법은 배웠어도 국제 개발협력이라는 분야는 생소했다. 공채 분야 중에 ‘법’이 없었다면, 당시 유미의 정보력이나 경험으로는 응시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가물가물하던 법 지식을 끌어모아 필기를 보고, 면접까지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누가 포기한 모양인지 추가 합격 통보가 왔다. 그렇게 유미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 내부는 층고가 높으면서도 창이 부족해 어두컴컴한 미술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처음으로 배치받았던 인사실이 있었다. 뒤쪽으로는 별관 건물이 한 동 더 있어서 사업 부서들이 있었다. 별관에서 이어진 뒷문 앞에는 개집이 있었는데, 수위 아저씨가 강아지 두 마리를 길렀다. 유미는 동기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강아지들에게 간식을 주곤 했다.


입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고 베트남 하노이로 출장을 갔다. 병원을 개보수하는 사업의 구체적 계획을 짜기 위해. 24살밖에 안 된 꼬맹이인 유미와 의사 두 분이 팀을 이루어 한국에서 출발했고, 베트남 현지 사무소에서 조사단장을 맡았다. 사업 대상 병원의 현황을 둘러보고, 지금 병원의 문제점이 뭐고, 어떤 것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목록을 작성한다. 사업 예산에 맞춰 세부내역을 협상하고 베트남 쪽에서 해줘야 할 면세, 통관, 인력 배치 같은 사항도 확정한다. 그 내용을 영어로 된 합의문으로 작성하고 서명하는 것까지 1주일 안에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출장 결과보고서를 제출하면 끝이었다.


서울-부산 KTX 타는 것도 어색했던 유미가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가서, 외국인들과 협상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지방대 어학원 출신의 영어가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자료 검토에 몰두했고, 출장지에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해야 할 일을 점검하고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중얼중얼 연습했다. 처음에는 다양한 억양과 발음의 개도국 영어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미얀마, 인도네시아, 몽골 등 아시아 국가로 계속 출장을 다니면서 2-3년이 지났고, 유미는 어느새 사업 집행계획을 짜고 업체를 뽑아 수억 원의 사업비를 집행하고 있었다.




회사와 창경궁, 종묘가 가까웠다. 유미는 점심시간에 종종 잰걸음으로 걸어가 김밥을 먹고 돌아왔다. 서울대 병원을 가로질러 넘어가면 10분 만에 창경궁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봄이면 새잎들이 반투명하게 팔락였고, 가을이면 돌담 옆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연극 극장들이 즐비한 대학로 쪽으로는 낙산공원이 있어서 아이팟에 음악을 잔뜩 넣고 성곽을 올랐다. 제법 경사가 있어서 성곽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이화동 비탈에 옹기종기 앉은 집들을 바라보곤 했다.


성곽을 바라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부산에는 이런 거 없었구나’ 수백 년 전에 쌓아 올린 돌들이 아직도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규정했다. 조선시대에 그 성곽 아래를 지나다녔을 사람들의 흔적 위에, 요즘 사람들의 삶이 포개졌다. 과거의 언덕에 현대의 집이 포개지고, 흙길에 아스팔트가 포개졌지만, 사람들이 그 길을 오가고 그 곁에 사는 건 여전했다. 오래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유미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좀 더 긴 시선으로 바라보면 지금 조금 우당탕탕 하는 것은 큰일이 아닌 것 같았다. 주말에는 종묘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죽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종묘가 가지는 고요함이, 수백 년을 쌓아온 시간이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유미는 오래가는 것들, 거대한 구조물들에 매료되었다. 천년을 버티는 궁과 성, 이천 년을 버티는 로마의 도로와 수도교들을 보고 있으면 그 속을 오가며 살았을 사람들의 생활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창경궁에 앉으면 쪽문을 오가던 무수리의 잰 발걸음이 어른거렸고, 폼페이에서는 시끌벅적하던 상가와 목욕탕의 로마인들이 어른거렸다.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아직 남아 있는 건물과 구조물들이 모든 것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인프라 사업 중에 처음으로 맡았던 사업이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와 내전 격전지였던 동부지역을 이어주는 도로설계였다. 유미는 그때 도로 설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자세히 알고 인프라에 반해버렸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도로는 표면의 아스팔트나 콘크리트층보다 훨씬 깊었다. 땅 속에 흙, 자갈과 흙이 섞인 보조층, 아스팔트 또는 콘크리트 재료들이 1미터쯤 쌓여있다. 활주로처럼 더 무거운 것이 지나가야 할 때는 콘크리트 밑에 철근을 깔기도 한다. 이렇게 집약된 재료와 기술, 시간은 모두 에너지, 더 나아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데 대략 1마일당 1백만 불, 요즘 환율로 하면 1 킬로미터당 7-8억쯤으로 셈한다. 도로에 응축된 에너지는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과 사람들이 빠르고 마찰 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전이된다. 전기로 불을 켜는 일만큼 도로에 쌓인 에너지가 속도로 전환되는 것도 마법이었다. 더 묵직하고 시간의 규모가 큰 마법, 유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이나 골짜기로 끊어진 공간을 이어주는 다리는 공간과 시간을 접는 효과를 준다. 송배전 사업을 하면서는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불을 켜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에너지를 전달시킨다고 느꼈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서 니모 아빠가 북대서양 제트류라는 바닷속 고속도로를 타고 대양을 건너 니모를 찾아가듯이, 인프라가 사람에게 주는 힘이 멋있었다. 선선한 여름날, 고가차도 밑에서 감탄하곤 했다.




공부를 하고 업무를 하고, 뭔가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때론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 학교를 하나 지은들, 직업훈련원에서 수백 명을 훈련한들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 싶었다. 물론 완벽함 일이란 없다. 유미가 정말 찜찜했던 것은, 자연스레 가난을 동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홀리(holy)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동료들을 보면 속으로 조용히 어색해했다.


가난은 자연재해 같은 것인지 모른다고, 적어도 운명 같은 거 아니겠냐고 혼자서 몰래 생각했다. 좋다, 동정하지는 않아도, 가난에 복수하고, 가난을 바로잡고 싶기는 하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꺼풀만 더 들어가보면 실제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적어도 이 일이 유미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대체로 과하게) 만들고 파는 일은 더욱이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한채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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