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낭비하다
유미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들었던 뉴스는 독한 감기가 돌고 있다는 정도였다. 전염병은 빠르게 전 세계로 퍼졌다. WHO가 한참을 망설이다 전염병의 대유행(판데믹)을 선언하고 각 국가들은 국경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치료제는 없는데 치사율이 낮지 않았다. 길거리에 빠르게 수거하지 못한 시체가 쌓이자 정부들은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사람들이 마트로 달려가 생필품을 사재기했다. 유미가 섬에 머무는 2주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클레어와 유미는 약속대로 그날 섬에 들어온 보트를 타고 산타크루즈 섬으로 나갔다. 산타크루즈 섬은 보트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갈라파고스 섬에는 아직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섬에 환자가 발생하면 손 쓸 새 없이 퍼져나갈 터였다. 갈라파고스에 있는 가장 큰 병원이 고작 30 병상이라고 한다. 심각한 환자는 모두 배나 헬기로 육지로 이송했다. 의료 여건을 감안하면, 환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갈라파고스로 들어오는 국내선 비행기도 모두 취소된 상태였다.
클레어와 유미는 보트 선장과 함께 우선 은행에 들렀다가 마트로 가서 생필품과 식재료를 구입할 계획이었다. 텃밭이 있으니 신선한 야채보다는 냉동식품이나 생필품을 위주로 구입했다. “섬 사이를 오가는 배가 끊길 수도 있을까?” 유미가 물었다. “글쎄….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 클레어는 말끝을 흐렸다. 유미는 은행에 가서 인출한 달러를 만지작거리며 그동안 머문 열흘에 대해 얼마를 주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클레어에게 신세를 져야 할까.
“클레어, 공항이 재개될 때까지 더 머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지낸 것을 포함해서 대가를 지불할게.”
클레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말했잖아, 나 돈 많다고.”
유미는 잠시 생각하다, “그럼 오늘 마트에서는 내가 계산할게.”
클레어는 아무려면 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클레어의 작은 섬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시간에 가까워졌다. 하루종일 굶고 돌아다녔더니 허기가 졌다. 유미가 “오늘은 내가 스테이크를 구울게 “하고 말하자, 클레어는 ”그럼 나는 샐러드” 하고 맞장구쳤다. 둘은 분주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음악을 틀어도 될까?”라며 클레어가 LP 더미에서 찾아낸 재즈앨범을 걸었다. 세상은 전염병 때문에 멈추어 섰는데, 유미는 묘하게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삶보다 죽음이 더 주목받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 치열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 속을 뛰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주어졌다는 게 유쾌했다.
“예전부터, 막히는 차 안이 좋더라고.” 유미는 말했다. 오늘 하루 클레어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뭔가 생산적인 걸 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더라고. 적어도 막히는 동안은 말이야.”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네 삶이 지나가고 있잖아. 아깝지 않아?”
유미는 대답했다. “삶이라는 게 한정적인 자원인데, 그걸 낭비하는 게, 아주 사치스럽고 좋아. 내가 낭비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낭비하는 거야. 돈으로 사치를 부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내 삶은 내 맘대로 낭비할 수 있지.”
말만 그렇게 할 뿐, 유미는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차 안에 갇힌 시간, 이렇게 판데믹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간만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유일한 낭비였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트레드밀에서 밀려나 꽈당하고 내동댕이 쳐진다고, 삶에는 늘 그런 섬뜩한 경고판이 붙어있었다. 그렇게 알뜰하게 살아서 대단한 걸 이루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직장생활과 오래 떨어져 사는 남자친구, 고양이 한 마리가 유미가 가진 전부였다.
클레어는 말했다. “그래 어떻게 살건 누구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클레어는 음악을 바꿨다. King Floyd가 1970년대 미국 남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Groove me, Trouble…. 달콤한 사랑노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다는 나이브한 사랑노래. 클레어는 레드 와인을 가져왔다. 부드러운 비프스테이크와 신선한 샐러드가 입맛을 돋우었다. 클레어와 유미는 판데믹이 허락한 낭비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쨍 하고 잔을 부딪히고는 유미가 물었다.
“클레어,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어?” 유미는 와인을 한 모금 맛 보았다. “오우, 맛있다.”
“응, 맛있네.” 클레어도 와인을 삼키고 미소지었다. “투자회사에서 일하다가…. 2008년에 부동산 가격 하락에 배팅했지. 그 외에도 몇 건이 더 있었고… 그리고 은퇴했어.“
유미는 와인을 꿀꺽하다 사레가 들릴뻔했다. “우와, 대단하네. 어떻게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걸 알았어?”
“내 보스가 알았지. 나는 그 사람을 믿었고.”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로는 이런 삶을 살고 있어. 내 운은 이미 그 때 끝났거든. 그래서 아주 조심히 살고 있어. 아주 고요하고, 외롭게. 삶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