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톱니바퀴
유미는 국경이 폐쇄된 날 회사에 전화를 걸어 휴가를 연장했다. 어느 나라에 있건 집 안에서 일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유미는 보안 컴퓨터를 잃어버려 일을 할 수 없었다. 올해 남은 휴가에 내년 휴가까지 보태서 한 달을 신청했다. 그 사이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비웠다.
‘온 세상이 일시정지인 판에, 내가 한 달 휴가 내는 게 대수겠어?’
바다사자와 부비새와 이구아나는 판데믹과는 상관없는 일상을 이어나갔다. 데이트 춤을 추던 부비새 커플은 알을 낳았다. 바다사자들은 여전히 오징어를 잡아먹고 느긋한 낮잠을 즐겼다. 이구아나는 아주 오랜 기간 그랬던 것과 똑같이, 멈추어 햇볕을 쬐었다.
유미와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유미는 일찍 일어나 클레어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낮동안은 수영을 즐겼다. 햇살이 본격적으로 뜨거워지는 1시부터는 계속 집에 머무르며 낮잠을 자거나 각자 할 일을 했다. 해 질 녘에는 함께 석양을 보러 절벽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서는 저녁을 만들어 먹고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음악을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빅히스토리, 전쟁사, 도스토옙스키와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섬에서 누리는 단순한 삶의 미덕에 대해서도 종종 얘기했다.
섬에서 수확한 토마토로 만든 스파게티를 먹은 저녁이었다. 클레어는 남은 토마토 건더기를 포크로 집어 킁킁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가장 훌륭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어. 어떤 종류의 수확은 반드시 기다림을 필요로 하니까.”
유미는 “이 정도의 속도가 딱 좋아. 다들 쓸데없이 바빴잖아. 나도 그랬고…”
“여기에 있는 동안은 느린 템포를 유지하면 되겠다.”
이 생활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클레어가 암시할 때마다 유미는 불안해졌다. 유미에게 시간이 충분하다면 그런 구멍이 숭숭 뚫린 그 옷감처럼 성긴 대화만으로도 클레어라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앵글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충분한 시간이 유미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급해졌다.
유미는 가끔 클레어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운이 이미 끝났고, 아주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 클레어에게는 가족도 연인도 없는 것일까? 화려한 삶을 즐길 수 있는데, 더 멋진 곳에서 살 수 있는데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돈이 가진 가능성을 거의 대부분 기각하고, 어떤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이런 외딴섬에서 살고 있다. 거기엔 어떤 기막힌 사연이 있겠지. 돈을 버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독한 불행에 빠뜨린 죄책감이라든지, 돈이 들어오고 나서 온 가족에게 불운이 찾아왔다든지, 자신의 몸이 아프다든지… 무엇이든 엄청난 얘기가 나올 것 같아, 유미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속죄의 의미로 고립을 선택했더라도, 오히려 지금은 치유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클레어는 부자답지 않게 소박한 삶의 방식을 유지했다. 스스로 식사를 만들고 가끔 빨래를 돌렸다. 집안에 쓰레기가 굴러다니지 않을 정도로 관리했고, 가끔 아주머니가 와서 대청소를 하고 가는 식이었다. 아주머니는 올 때마다 이런저런 소식도 전해왔다.
“아직 공항이 폐쇄되어 있어요. 덕분에 섬에는 환자가 아직 한 명도 없죠. 다행이에요. “
관광객이 없어서 산타크루즈 섬은 아주 한적해졌다고 했다. 팔던 생선이 먹는 생선이 되었을 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념품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은 곤란에 빠졌지만, 친척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왔다. 부족한 것은 클레어가 도와줘서 한시름 덜었다며 아주머니는 클레어의 손을 꼭 잡았다.
유미는 휴가를 다 소진하고 휴직 신청을 했다. 언제 복귀할 수 있을지 불분명한 채로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는 동안 유미는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 갔다. 결국 인간이 이 세상에서 돌리고 있던 톱니바퀴가 멈추어도 인간과 동물이, 이 자연이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인터넷이 없어도 지식은 책이라는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책이 없어도 이야기가 있었다. 돈이 없어도 나눠 먹을 수 있었고, 나눠 먹은 음식은 돈으로 사 먹은 음식이 줄 수 없는 유대감을 주었다. 특히 유미 자신이 돌리고 있던 톱니바퀴는 지구 규모의 낭비를 부추기거나, 적어도 방조했던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녁마다 유미는 새로운 삶의 방식, 생명이 충분히 비효율적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작은 규모의 삶의 가능성에 대해 써나갔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입고, 더 많이 버리고, 더 많은 정보를 주고받고, 더 멀리 여행하며 살면 모두들 행복해지고 이 세상도 더 좋아진다고 믿으며 살았던 과거를 하나하나 재해석했다. 도로를 깔고 전기를 만드는 사업이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더 많은 것을 파괴시키지 않았을까 고민했다. 저수지를 만들어줬더니 생선을 키워 온 마을에 나눠먹던 농부를 기억해 냈다. 생선은 시장에 가서 팔아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어리석음에 대해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