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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씨 Apr 24. 2019

먼지 묻은 버킷리스트와 만남

합정역 6번 출구

5시 55분.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느껴지는 5분이 싫어 사직서를 냈어.

일을 그만두고 하릴없는 백수로 지내던 어느 날 ‘아, 지루해. 더 이상 안 살아도 될 거 같은데?’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지.

마음속에 담아만 두고서 용기가 없어 행동에 나서지 못했던 나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할 때였어.

먼지 묻은 나의 소원은 여행.

나는 곧바로 여행 준비를 시작했고, 그러던 중에 한 남자를 알게 된 거야.




작은 세상 속에 살던 내가 한없이 자유로운 남자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어.

그의 뒤로 끊임없이 바뀌는 풍경, 그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귓가에 맴돌던 TROYE SIVAN의 'YOUTH'.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단숨에 그에게 매료되었어.

물론 이성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 써였어.

현실을 뒤로하고 떠나는 여행에서 나 또한 그처럼 되길 바랐거든.


그는 포르투갈로의 교환학생을 준비 중이었어.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졌어.

수줍은 마음 한 스푼, 거절에 대한 무서움 반 스푼 담아 그의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냈어.

“안녕하세요:) 동영상 보고 연락드려요. 여행을 준비 중인데 궁금한게 너무 많아서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혹시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던 그는 “전 누구에게 조언할만한 사람이 아니에요.”라며 머뭇거렸어.

내가 생각해도 웃겼지.

메이플스토리에서 초딩들이나 할 것 같은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이라니.

역시 무리였나, 하고 생각한 찰나 그가 만남을 수락해줬어.


그와의 마지막 메시지로부터 약 일주일이 흘렀어.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짧은 여행을 떠났어.

합정역 6번 출구, 오후 3시 11분.

영상 속 그를 만난 순간이야.


그와 만나 홍대의 간판 없는 어느 카페로 갔어.

그에게 여행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늘어놓았지.


“500만 원을 경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얼마나 여행할 수 있을까요?”

“여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 달라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 루트 괜찮을까요?”

“음..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튀니지-이집트 이렇게는 어때요? 이집트에는 다합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여행자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에요. 물가도 싸고, 홍해 바다에서 액티비티도 즐기고, 시간 보내기 엄청 좋거든요. 아, 그리고 튀니지라는 나라는 저도 안가본 곳인데 지인분이 엄청 좋았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

그의 말대로였다. 이집트 '다합'은 여행자들의 천국이었고, 나는 이곳에서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머물렀다.

“제가 귀가 얇아서그런지 듣기만해도 설레네요. 으하하! 그냥 기간도, 돈도 생각하지 않고 떠나볼래요! 편도 티켓을 끊어서 가도 될까요?”

“국가마다 달라요. 입국하는 국가에서 한 달 내로 나가는 티켓, 즉 버리는 티켓을 하나 사세요. 유럽 내에서는 항공편이 싸니까요:)”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는 마치 사기꾼처럼, 아니 언어의 마술사처럼 말을 너무 잘했거든.

이야기는 저녁 식사 자리로 그리고 또다시 티타임으로 이어졌어.

시계는 어느새 밤 11시를 가르쳤고, 다음 만남에 대한 기약 없이 헤어졌어.


그리고 그가 포르투갈로 향하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났어.

그는 내게 자기 것과 같은 다이어리와 엽서 한 장을 건넸지.

그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못다 춘 살사는 포르투에서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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