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42명을 찢은 이유
큰 아이가 세 살이었을 때였습니다.
잠자리에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우리 가족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열왕기하를 펼쳤습니다. 엘리사 선지자 이야기였습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서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열왕기하 2:23-24)
큰아들이 물었습니다.
"엄마, 곰이 애들을 잡아먹었어?"
"응... 그런 것 같아."
"왜요? 그냥 대머리라고 놀렸는데?"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간이 작고 겁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이 싸우면 멀리서 떨었고, 개만 봐도 엄마 뒤에 숨었습니다.
그때는 여름이면 납량특집이라며 무서운 드라마를 TV에서 했는데, 그 장면이 떠올라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목소리만 높여도 심장이 쿵쾅거렸고, 누군가 다치는 걸 보면 눈뜨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성경의 이런 구절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여리고 성 전멸, 가나안 정복 전쟁, 그리고 이 엘리사와 곰 이야기.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실까?'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한인 교회에 속한 도서관에서 잠깐 봉사를 했습니다.
그때 주석이며 히브리어 사전 같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작은 아이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아림".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쓰였을까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종들을 지칭할 때 "네아림"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군인들을 "네아림"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유치원생이 아니었습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리 분별이 가능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도 다시 봤습니다.
바로 그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너도 죽어서 올라가 버려라"
"네 스승처럼 꺼져버려라"
라는 의미였습니다.
단순한 외모 놀림이 아니라, 죽음을 바라는 저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건, 하나님 자체를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42명이 동시에 나타나 조롱했다는 것.
이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조직적이고 계획된 조롱.
한두 명이 장난친 게 아니라, 집단이 선지자를 위협한 것이었습니다.
벧엘이라는 장소
더 중요한 건 장소였습니다.
벧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거룩한 곳이었지만, 이제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우상 숭배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운 곳.
백성들이 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곳.
42명의 청년들이 선지자를 조롱한 것은, 벧엘 전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을 울린 것은 레위기 26장의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수백 년 전 모세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거스르면... 내가 들짐승을 보내 너희 자녀를 움키게 하리라."
곰이 나타난 것은 엘리사의 개인적 화풀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던 도시 '벧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기에 임한, 예고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선지자를 거부한 북이스라엘은
실제로 약 150년 후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42명은 북이스라엘 전체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것 같았습니다.
미국에 와서, 코리아타운에 살 때였습니다.
갱단 활동이 있었고, 총기 사건도 종종 있었습니다.
어느 날 뉴스에서 10대 갱단원들이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한 사건을 봤습니다.
그들도 "아이들"이었습니다. 17세, 18세.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짓은 결코 어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엘리사가 마주한 것도 이런 것이었을까.'
42명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둘러싸인 선지자. 그건 장난이 아니라 살기등등한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사회가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선지자를 위협할 때, 침묵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악을 방치하는 것이 더 폭력적이지 않을까?'
저는 비폭력주의자입니다. 하지만 갱단이 활개 치는 거리에서 경찰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방관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하나님을 조롱해도 괜찮다고 넘어가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부모로서 저는 늘 고민합니다.
아이들에게 예의 바르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잘못된 것에는 맞서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분.
용서하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
그분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를, 제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조롱해도 괜찮구나'라는 메시지가 퍼졌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전체가 더 빠르게 타락했을 것입니다.
그 150년 후의 멸망이 더 일찍 왔을지도 모릅니다.
겁 많은 제가 이제는 압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불편하고 무섭지만, 필요하다는 것을.
사랑과 공의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저는 여전히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눈을 감기 전에, 그 배경도 보려고 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이야기가 독자님의 삶에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난해한 성경을 헤매다, 뜻밖에 삶의 답을 찾기까지.
우리 함께 걸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