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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ya Apr 15. 2019

가장 배고프고 아팠던 순간들

가장 배고팠던 순간


디피링 마을에 도착하고 며칠 후의 일이다. 마을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내 집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분간도 어려울 때, 갑작스런 마을대표의 부름을 받고 아침도 거르고 산을 올랐다. 당시 마을대표 자택이 있는 언덕 위 마을까지 걸어가는데도 숨이 찼다. 마을대표로부터 이웃마을에서 진행하는 마을 프로젝트를 보고 올 것을 지시 받았다. 다행히도 이웃 마을에서 온 아주머니와 함께 걸어갈 수 있었으나, 아주머니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했다. 향하고 있는 마을이 도대체 어디인지 궁금했지만 묵묵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길을 걸어 걸어 언덕을 넘고 약 1시간 남짓을 걸었다. 뜨거운 태양과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에 목마름과 배고픔이 더해갔다.


“아주머니, 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러는데요. 혹시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을까요? ”

아주머니는 대답 없이 그저 웃을 수 밖에. 내가 말하는 영어를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1시간을 넘게 걷자 이웃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진행하는 빵 만드는프로젝트를 소개받았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의 발전을 위해 다양하게 준비하는 프로젝트를 마을대표는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정을, 두 명의 아저씨가 함께 해 주었다. 다행히 한 분이 영어가 가능했고 그에게 즉각적으로 나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전했다. 근처 슈퍼마켓이 없음을 말하며 그는 잠시 당황해 하더니, 옆에 서 있는 할아버지 한 분에게 현지어로 무언가 말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그의 집에 도착했다. 집을 지키고 있던 부인에게 나의 배고픔을 전달하더니 아주머니는 직접 만든 빵을 내왔다. 어찌나 맛있고 배가 부르던지 그 맛을 아직까지 기억하곤 한다. 시간이 지나, 그 쪽 마을을 방문 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그 언젠가 낯선 이에게 선뜻 식량을 내어주신 두 어르신 부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늘 자리했다. 마음처럼 먼 길을 자주 찾아가지 못했고 약 1년이 지나, 그들 집을 다시 찾았다. 그 후 몇 개월에 한 번씩은 만남을 주고 받았다. 방문할 때마다 직접 만든 빵, 농장에서 수확해 온 콩과 야채들을 선물로 내어주며 나를 반겨주었다.


2년의 삶을 뒤로 하고 마을을 떠나는 날이었다. 나의 소식을 이웃을 통해 들은 할아버지가 나를 다시 부른다. 무언가를 받아갈 것이 있다고 한다.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씨였지만, 할아버지를 만나러 열심히 또 걸었다. 


할아버지의 선물, 집 밖 닭장 속에서 직접 기르고 있던 토종 닭 한 마리를 안겨 주셨다. 

“U tlo ja nama pele u tsamaea.” (한국 돌아가기 전에 고기 먹고 가야지.)


Malealea Lodge @Juyapics, 2012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자면


산악지대에서 말을 타고 트레킹을 했다. 해발고도가 2,500m가 넘는 산악지대에서 훈련된 조랑말을 타고 산 깊숙이 들어갔다. 갑자기 하늘이 시커매 지더니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반짝거리는 천둥번개에 놀란 말이 앞발을 동시에 들면서 번쩍 뛰어들었다. 그 순간 손에 꽉 쥐고 있던 줄을 놓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동시에 머리를 땅에 박고 떨어졌다. 


헬멧을 쓰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돌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는 레소토 산간지역 한 가운데서 아주 위험한 순간이 될 뻔 했다. 허리가 삐끗하더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넘어지면서 다친 허리의 가벼운 타박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119 구급요원을 부르기에도 너무 깊이 들어온 산 속이라 주위 양치기 소년들이 사용하던 담요를 들것으로 사용해 산을 가까스로 내려올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레소토 수도 마세루 내 병원을 찾아 갔더니, 허리의 타박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3일의 시간이 지나자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과일을 먹어도 먹는 것을 그대로 토해내고 물 외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결국 남아공의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고 약 30시간을 무의식 상태에서 보냈다. 결과는 뇌진탕이었다. 


당시 남아공 종합병원에 입원을 위해서는 현금 300만원 가량의 예치금이 필요했다. 의식을 잃고 있던 나를 위해 인근 도시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이 모여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나를 단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깨어날 때까지 모두가 기도로 나를 기다려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다행히도 뇌의 깊숙한 곳까지 다치지 않아 입원을 하며 최대한 안정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약 3주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시 정상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에서 있는 동안, 또 퇴원해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많은 생각도 할 수가 없고 모든 것을 잠시 중지시켜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아파오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천천히 기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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