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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ya Apr 15. 2019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간 날들

레소토 시골 오지마을에서 찬란했던 나의 2년

레소토 시골 마을에서 찬란했던 나의 2년


성냥불 피우는 법을 모르고 직접 손빨래를 해 보지 못한,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았던 내게 전기도 수도시설도 없는 시골마을에서의 삶은 어땠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내 인생에 가장 찬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가져다 주는 순간들이라고 생각된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곳,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머리는 며칠을 감지 않아 자연 드레드가 될 것 같지만 있는 그대로의 행복한 나를 보았다. 철저히 나와 나를 둘러싼 자연, 그리고 이웃들이 함께하는 삶이었다. 그곳에는 바로 공존하는 것에 기쁨을 주는 나의 소중한 이웃들이 있었다. 지난 2년의 삶 동안 나는 자원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일상을 전하고 나눌 줄 아는 이웃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받고 배우고 왔다. 


특히 혼자 생활하는 데 몸이 아프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도움을 준 사람들도 이웃들이었다. 언젠가 마을 내 볼거리에 걸린 한 남동생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가 나도 볼거리에 걸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파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볼거리에 걸려 아파 누워있었던 동안 아침 저녁으로 이웃들이 찾아왔었다. 끼니를 거를 까 걱정이 되어 직접 죽을 만들어 오고,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이불을 챙겨오고, 약이라도 사 먹으라고 단 돈 3천원을 꾸깃꾸깃 접어 들고 오는 이웃들이 있었다. 내가 아파 기도하러 간다는 사람들, 아낌없이 나누고 서로에게 힘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이웃들과의 순간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내 마음 속을 떠나지를 않는다.


그렇게 나를 아껴주고 찾아주는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내가 노력한 점은 바로 현지어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레소토에서 대부분의 젊은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나 인근 국가인 남아공으로 떠났고, 남아있는 마을 내 주민들의 대다수는 노인층과 어린아이들이었다. 영어를 학교에서 공용어로 가르치긴 했지만, 나이가 많은 어른들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틈틈이 현지어를 배우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손바닥만한 공책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알아듣지 못했던 말이나 하고 싶었던 단어, 문장을 적어두고 영어가 가능한 중학교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가며 익히다 보니 하루하루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로부터 약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주민들의 대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새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가 3명입니다.


정해진 교과서나 문법책을 사용하지 않은 채 마을에서의 생존과 주민들과의 나은 소통을 위한 도구로 현지어를 배웠었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나만의 방법으로 언어를 익히게 되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자기소개에 내가 가장 먼저 알고 싶었던 문장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문주입니다.”가 아니었다. 바로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가 3명입니다.”였다. 마을을 벗어나 다른 지역이나 도시에 있을 때마다 젊은 동양인 여자에 대한 많은 남성들의 호기심이 있었고 나만의 그들을 정중히 부탁하는 말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아무도 내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머니


어느 날 내게 어머니가 생겼다.

마을에 홀로 들어와 살아가고 있는 젊은 외국인인 나에게 한창 부모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마을대표의 배려였다. 디피링 마을 초등학교 초대 교장선생님 출신으로 마을 내 노인들, 학부모들, 현재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까지 모두가 그녀의 제자이다. 마치 마을 주민 모두가 이 분의 학생이자 자녀라고 믿길 정도로 모두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었다. 이름은 메 타비타 (Mme Tabitha)로 이미 70세가 넘은 연로한 노인이었다.


그녀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본인의 집으로 기꺼이 받아들여 학교에 다닐 수 있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마을 내 중요 결정사항이 생길 경우, 주민들 및 마을대표에게 가장 큰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잃고 알코올중독에 걸린 주민들을 불러들여 본인 밭일 가꾸는 작은 일거리라도 만들어 내어주는 분이었다. 


이런 분이 나의 어머니가 되었고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에 모든 것이 서툰 내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요리하는 법, 마당을 쓰는 법, 침대를 정리하는 법, 더러워진 냄비를 깨끗이 닦아내는 법 등 익숙하지 않은 시골생활에서 필요한 여러 생활의 지혜와 노하우를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컸던 가르침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과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 나누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Thukhube @Juyapics, 2011


어머니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어느 날 집에서 혼자 청소를 하고 있던 중, 누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밖을 나가자 젊은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누구세요?” 

“메 타비타(Mme Tabitha)가 누나 물 뜨는 것을 도와주라고 보냈어요.”

혼자서 1km가 넘는 길을 수레바퀴를 이용해 물을 뜨러 다녀야 했던 내게 동생을 보내준 것이다. 


그렇게 동생은 일주일에 2~3번 물 뜨는 것을 도와주러 찾아왔고 나는 문득 궁금해 졌다. ‘내가 이 친구에게 노동비를 제공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마을에서 자원 활동가의 이름으로 주민들과 동등한 삶을 꾸려가며 살아가고 있었고 내게서 현금이 오고 가는 소문을 막고 싶었다. 대신 나에게 도움을 나눠주는 동생에게 맛있는 밥 한끼 식사를 대접하고 내가 시내에 나갈 때마다 식 재료를 사다 주는 것으로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니, 뚜후베 (Thukhube) 동생에게 제가 어느 정도의 용돈을 주기를 혹시 바라셨었나요?”

어머니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내가 너에게 그 친구를 소개해 준 데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단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80이 넘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는 아이인데 내년이면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갈 것이란다. 그 고등학교에 가기 위한 방법을 네가 찾아줄 수 없을지 그 기대를 해 보았단다.”


그리고 나는 수도에 나가 교육부를 찾았다. 레소토 국가 내에서 고아들을 위한 장학제도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 당장의 용돈으로 동생을 돕는 것 이상으로 그의 다가 올 미래를 위한 준비를 위한 도움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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