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위한 화장실이 없었다. 벽돌 몇 장을 쌓아두고 그곳에서 볼일을 보던 학생들. 이 아이들에게 화장실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되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해교육을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사업목표였음에도 가장 먼저 화장실 건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들어보았고 그 중에서 가장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았다. 마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최대한 많은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싶었기에, 먼저 육체노동을 통해 서로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초등학교 전교생의 학부모들을 소집하여 요일 별로 마을 별로 그룹을 정하여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로 하였다. 공평하게 일에 참여하기 위해 출석체크를 담당하는 대표도 선정하고 결석에 대한 벌금을 내는 방식도 정하였다. 그렇게 마을 내에서 건축기술을 가진 남성분을 건축가로 선정하고 학부모들의 무료로 제공되는 노동인력을 통해 건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11월,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 칠을 위한 우물물을 퍼 나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부모들은 서늘한 바람을 기다리며 지각을 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만큼 일은 지연이 되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배가 고파 일은 배로 힘들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학부모들은 오지 않았고 결석률이 높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12월의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공사가 잠시 멈췄고 연휴가 지나 학교를 찾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여름 장마기간 동안 퍼부은 비로 공사가 채 끝나지 않았던 화장실 구덩이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약 2m가 넘는 구덩이에 누가 들어갈 수 있었을까? 바로 아이들이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린 화장실이 새로 생긴다는 기쁨 하나로 교복 차림으로 직접 물 구덩이에 들어가 물을 빼내려고 한다. 그렇게 아이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나머지 공사에 필요한 기초 공사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사를 끝내기 위해서 학부모들의 노동력이 계속해서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떠나버린 학부모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 동안 공사기간 동안 내가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인화하여 학교 외부 벽에 붙여두기로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사진을 구경하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왜 우리 엄마 사진은 없어요?”
“응, 왜냐하면 너희 어머니는 일 하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가 집에 가서 어머니께 설명 드려 볼래?”
놀랍게도 어머니들은 다시 공사장에 찾기 시작했고 3개월이 훌쩍 지나 아이들을 위한 화장실이 완공이 되었다.
마을에 도착하고 이틀 뒤 마을에 위치한 하나뿐인 중학교, 말레쩨마 (Mmaletsane) 중학교에 초대를 받았다. 작은 도서관이 있는 교실에 100명이 넘는 전교생이 한 가득 모여 있었다. 간단히 나의 소개를 하는 시간이 주어졌고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김문주이고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이는 24살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 디피링 마을에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일할 계획입니다.
궁금한 내용이 있다면 자유롭게 질문해 주세요.”
“당신은 아이가 몇 명인가요?”
“아,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질문?”
“네, 그래서 당신은 아이가 몇 명 있나요?”
반복되는 아이들의 질문은 내가 몇 명의 아이를 가지고 있느냐였다.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궁금해 질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알 수 있었다. 20대 중반의 내 나이라면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중학생의 한창 어린 나이에 조기임신 탓에 학교를 중도 포기하는 여학생들이 많은 만큼 10대 임신은 이곳 시골마을에서 흔히 보여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10대 임신율이 높은 것일까? 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져 나갔다. 이곳 레소토 시골 마을에서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처럼 방과 후 교실이라든지 학교 밖에서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문화거리가 따로 없었다. 흔히들 도시의 청소년들이 누릴 수 있는 영화관, 미술관, 체육관 등 학생들을 위한 놀이시설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반복되는 하루에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놀 거리는 무엇이 있겠는가? 놀랍게도 그런 아이들은 마을 내 빈집이나 숲에 가서 학급 동료들과 섹스를 나누는 것이 하나의 놀이로 이용되고 있었다. 올바른 성문화와 교육이 자리 잡히지 않은 채 아이들의 성문화가 일상 속에 만연했던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나는 어떠한 역할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할 일을 나누자!
이런 아이들에게 과연 나는 어떠한 역할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할 일을 나누자’라는 취지로 방과 후 동아리 활동 및 방학기간 동안 특별수업 형식으로 함께 마을 신문 만들기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1주일에 2번씩 우리는 꾸준한 만남을 이어나갔다. 학교 정규수업 후, 빈 교실을 이용하다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 공간 내 빈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 페인트 칠을 하고 청소를 마친 후 우리만의 아지트 장소가 마련되었다. 신문 만들기에 필요한 본격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여러모로 고민해 보았다.
아이들과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시에 글을 쓰는 연습을 할 수는 없을까? 그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빈 종이 3장과 펜을 주면서 ‘각자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써볼 것을 제안해 보았다. 각자가 적게는 14년, 많게는 16년 정도의 삶을 살아오면서 느낀 나만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보는 시간이었다. 약 2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은 빼곡히 적어 내려간 나만의 이야기를 조금은 부끄럽고 서툰 방식으로 내보였다. 그 중, 나의 마음을 울린 하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난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요.
우리 아버지는 이웃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매일 술만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혼자서 우리를 키우는 어머니에게 충분한 돈을 가져다 주지 않았고
자식들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매일을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나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이 믿겨지지 않았어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인데, 아버지의 죽음이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할 줄은 몰랐어요.”
이곳, 레소토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면서 최소 한 달에 한 번 마을 이웃의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까? 에이즈 (HIV/AIDS) 감염, 결핵, 그리고 기타 다른 질병, 사고들로 소리 소문 없이 이웃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이렇게 사망률이 높은 시골마을에서 부모, 형제, 자매, 자녀를 잃는 일은 허다하기에, 이곳의 사람들은 죽음의 아픔을 크게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혼자 착각했었다.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 아무리 밝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숨겨둔 아픔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픔과 슬픔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