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인도가 있었다.
20대의 절반을 아프리카에서 보낼 수 있기까지
누구나 당연시 여기는 평범한 안락한 삶에서 누구나 한번쯤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할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평온한 길을 걷던 내게 혼자만의 내적 갈등은 늘 있어왔다. 과연 내 인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우리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일까? 학교 내신성적과 명문대학, 취업이 인생의 정해진 길일까? 마음 속 꿈틀거리던 고민들을 껴안은 채,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의 내적 갈등은 더 깊어졌다. 진정 성인이 되는 길을 동아리 활동이나 대학 성적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제한되어 있었다.
20살의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으로 붉게 타오르던 신비로운 땅, 인도를 강하게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살, 용기를 가지고 그곳을 찾게 되었다. 가난과 더러움이 있는 곳,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게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나는 사람을 만났고 사랑을 배웠고 또 내 자신을 찾아왔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 문화, 종교가 다른 이들 속에서 공존하는 법,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개체로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내 삶의 정해진 기준과 선입관 없이 사람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데 스스로의 방법을 터득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일반생활에서 찾아오는 결핍이나 불편함 없이 주어진 삶을 당연시 받아들이고 살아나갔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인도에서의 첫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다. 돈이 가져다 주는 물질적 행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세상의 다양함과 다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게 때가 낀 인도의 버스 창문을 바라보며 배울 수 있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여행에서 배운 나만의 철학과 가치관으로 평범한 일상 속, 최대한 남과 다른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대학 4학년 졸업 직전, 내 마음을 움직이던 꿈의 땅, 인도로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여행에서 나는 첫 번째 여행에서 배운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 나가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평소 산을 좋아하고 등산을 좋아했던 내게 인도여행에서의 히말라야 등반은 늘 동경의 목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혼자 여행 중이었던 내게 가이드나 짐꾼 없이 홀로 산을 등반하는 것을 무리였다. 그렇다고 여행사를 통해서 한국인들 관광객들과 그룹투어를 선택하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머물고 있던 게스트하우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와 마음이 맞아 관광지가 아닌 그곳의 주민들이 찾는 산을 오르기로 했다.
서점에서 산 지도 한 장을 손에 쥐고 버스를 타고 마을 끝 종점에 내려 개울을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해진 등산로가 없었기에 때론 길을 잃기도 했고 오후 4시경이면 가까운 마을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관광지가 아니었기에 따로 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없었고 우리는 동네 이웃주민들 집을 직접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인연처럼 우리가 찾은 집에는 이미 외국인 부부 2명이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데이비드와 호주에서 온 로라는 4개월 째 히말라야 산 중턱 마을, 담다미 (Damdami) 마을에서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과 방과 후 교실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특정한 기관의 지원이나 정부의 도움 없이 지인들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 그대로의 ‘봉사활동’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히말라야 중턱에서 하얗게 뒤덮인 산을 창문의 배경으로 바라보며 진정한 나눔의 실천이 있는 삶, 그 ‘봉사’의 길이 내게 뚜렷이 자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