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라떼 i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데렐로 Jul 14. 2022

그릇의 추억(하)

오랜된 인연의 끝(?)

■그릇의 추억(요약 : 아내와 나는 결혼 초부터 30년 가까이 한 종류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사용했다. 장모님이 마련해 준 그 그릇의 이름은 석하다. 얼마 전 우리 부부는 그 그릇을 대체할 새 그릇을 한 벌 샀다(이렇게 세 줄로 줄일 수 있는 내용을 그렇게 길게 썼었구나...쯧)


석, 하. 결혼과 함께 아내와 내가 사용한 그릇의 이름이다. 그릇 아랫면에 있는 글씨를 이 그릇의 이름으로 삼았다. 이것은 아마도 그릇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나 아호일 것이다. 석하(石河)라는 한자 아래에 낙관에 해당하는 도장이 있는 걸로 보아 그리 짐작된다.


석 하. 돌 석(石)에 물 하(河). 자구 그대로 해석하기는 어려운 이름이다. 나는 돌과 물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이 그릇을 대할 때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는 경구를 떠올리고는 했다. 나의 부박함을 조금이나마 보완해 보고자...

사진을 찍다보니 백색이 눈부시다. 사진 위-석하 밥그릇, 국그릇, 간장종지. 아래-석하의 이름 두 자.


내가 이 그릇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야 스무 번쯤이나 될까. 그래도 이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백년 쯤 전까지도 이 땅에는 제대로 된 이름을 못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삼월이 사월이도 이름은 이름이되 제대로 된 이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아지(阿只)라고 쓰고 아기라고 불렀던 똑같은 이름의 여성들. 거기에 마당쇠를 보태면 그럴 듯한 이름의 소중함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석하는 밥그릇과 국그릇은 물론이고, 반찬그릇, 간장종지, 요리를 담을 커다란 접시 등 식사할 때 필요한 그릇 일습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가운데, 밥그릇과 국그릇, 간장종지는 늘 우리 부부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만약 그릇에도 기억이 있다면, 석하는 나와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소중한 시간들부터 쓸데없는 소리까지 우리 부부의 삶을 가장 많이 기억할 물건이다. 


석하는 우리 집에서 쓰는 그릇 가운데 가장 ‘튼튼한’ 그릇이다. 실수로 허리 높이에서 석하가 자연낙하 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때 석하는 중력을 이겼다.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깨지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 다른 그릇과 부딪혔는데도 깨지지 않았다. 다른 그릇은 깨졌다.


그런데 이 튼튼함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점이 되었다. 그리 튼튼하니 그릇을 바꿀 일이 없었다. 깨지고 이가 빠지면 바꿀 텐데, 그럴 일이 없는 것이다. 석하의 가장 큰 장점인 보기 드문 내구성이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사하다.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를, 나는 장모님을 생각하며 30년 가까이 석하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5년 쯤 전 이사를 하면서 석하의 상당 부분을 ‘정리’했다. 점잖게 정리라고 해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내다 버렸다.  밥그릇, 국그릇과 간장종지 등만 빼고.(*)  장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그때만 해도 인연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것인 줄 알았다. 


이천 도예촌에서 아내가 쓸 보라색 밥그릇과 국그릇을 사온 후 나는 우리가 쓰던 석하 국그릇과 밥그릇 한 벌을 찬장 안쪽에 깊숙이 넣었다. 이때 석하가 서운해 하는 듯한 느낌이 잠깐 들었다. 아, 이제 나는 사물과도 교감하는 상태가 되었구나. 잘 하면 조만간 도가 통하겠구나...


그런데 새로 산 보라색 그릇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 집에 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때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다른 그릇과 살짝 부딪혔는데 이가 빠졌다. 석하가 생각났다. 중력도 이겨냈던 석하가. 이 빠진 그릇... 임플란트를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이 빠진 그릇은 퇴역하게 되었다. 살다보면 이렇게 짧은 인연도 있다. 보라색 그릇 대신 임시로 다른 그릇을 변통했다. 그리고 이천에 갈 계획을 잡았다. 

위가 국그릇, 아래가 밥그릇. 밥그릇이 크게 나왔다. 위 오른쪽은 이 빠진 국그릇. 꼭 앞니가 빠진 것 같다. ‘정리’하지는 않았고, 각종 약을 담는 그릇으로 쓰고 있다.


봄볕을 안고, 다시 찾은 이천의 도자기 가게. 예술에 가까운 포장 솜씨를 보여줬던 여주인은 우리 부부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력은 포장 솜씨만큼 좋지 않았다. 보라색 그릇이 이 빠진 이야기를 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는데도 별로 공감하는 기색도 아니다(그릇 값을 깎으려는 치졸한 생각 때문이 아니다. 같은 그릇을 놓고 공감하는 마음을 느끼려 했던 것뿐이다). 한번 팔고나서 그 가게 밖으로 나가면 ‘출가외인’이라도 되는 것일까. 


아내와 나는 같은 그릇이 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한 가지 예상 못한 일은 먼저 살 때는 세일 중이어서 가격이 쌌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제 값을 주고 새로운 보라색 그릇을 샀다. 


그릇 쇼핑을 끝낸 아내는 가게 문을 나서면서 “자기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사러 가자”고 한다. 

무슨 소리인고 했더니, 자기는 보라색 그릇에 이제는 별로 정이 안 간단다.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과 가정의 평화를 위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뒤를 따랐다. 


마음을 정하자 물건은 쉽게 눈에 띄었다. 보라색 그릇 가게의 바로 맞은편 가게에서 너댓가지 색깔이 함께 칠해진 그릇(오색그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평소와 달리 쉽게 결정을 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밥그릇과 국그릇 1.5벌을 사들고 집으로 왔다.

새로운 인연의 오색 그릇. 밥그릇보다 국 그릇이 훨씬 크다. 이유는 잘 모른다. 원래 용도와 다르게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로써 우리집 밥그릇 수가 널리 공개되었다.

집에 돌아와서의 행위는 바둑으로 치자면 외길 수순이다. 내가 쓰던 석하 밥그릇과 국그릇은 먼저 들어간 그릇에 포개져서 찬장 깊숙이 들어앉았다. 아내는 새로 산 오색그릇을 쓰기로 했고, 나는 팔자에 없는 보라색 그릇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났는데, 왜 자꾸 석하가 마음에 쓰이는지 모르겠다. 무겁지만 두툼해서 무언가 믿음직한 느낌도 있고, 뜨거운 내용물이 쉬 식지 않는 점도 좋다. 그런데 아내는 나처럼 신경 쓰지는 않는 듯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신 건강에는 아내와 같은 태도가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밥그릇을 놓고 인연까지 떠올리는 건 ‘오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밥그릇에 1만 끼니 이상 밥을 담아 먹었다는 걸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쓰인다. 내가 치워버린 그릇에 마음을 쓰는 게 모질지 못한 심성 때문인지, 나이 먹어가면서 생긴 회고조의 마음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석하가 없는 밥상은 한동안 서운했다.


*석하를 정리하며 헤아려 보니 전체 갯수는 40개 정도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릇의 추억(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